1983년, 부림사건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이후 침체되었던 부산의 민주화운동은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의 활성화로 상징되었으며, 최성묵 목사는 그 선두에 서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종교계에서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부산지부(1982년 3월 창립), KNCC 부산인권선교협의회(1984년 4월 창립), 부산지구기독청년협의회,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청년불교도연합(1984년 7월 창립) 등 여러 조직이 창립되거나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며,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특히 1984년 4월 22일에 출범한 부산인권선교협의회(부산인권위원회)는 K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의 지원으로 설립된 지역 인권 단체로, 15명 안팎의 개혁 성향 목회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최성묵은 이 조직의 총무로 활동하며, 택시기사들의 대규모 시위사건을 비롯한 여러 시국 사건에 대한 양심수 지원활동과 법률 구조 활동,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와 인권예배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부산인권위원회는 1986년 KBS의 시청료 거부 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 단체의 활동에 이어 1984년 10월,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부가 창립되었습니다. 이 지부는 낙동강 하구언 문제, 온산의 공해, 광양제철 건설에 따른 공해 피해 등에 대처하는 환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의 손덕만, 송기인 신부와 최성묵 목사, 부산의 여러 재야활동가들이 결합하여 공식 출범한 이 연구소는 군사독재정권의 반민주성과 반민중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등 다양한 부문 운동도 활성화되었습니다. 서울의 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통합논의에 발맞춰, 1985년 5월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가 출범했습니다. 이 조직은 종교계를 넘어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탈종교적 운동단체로, 송기인 신부, 최성묵 목사, 김광일 변호사 등 여러 재야 인사들의 요구와 청년 활동가들의 갈망이 맞물려 만들어졌습니다.
부민협은 학생운동 선후배들이 실무 일선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들에 비해 순조롭게 활동을 이어갔고, 종교 단체들과의 연대 활동도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원만한 협조 관계는 1987년 6월항쟁을 힘차게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민협의 초대 회장은 송기인 신부가 맡았으나, 1987년 초, 부산교구청 주교의 명령으로 미국의 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보기관의 작용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 송신부는 해외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주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최성묵은 송신부에게 “사제직을 포기하더라도 그런 인사명령은 거부하라”고 요구했으나, 결국 송신부는 해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송신부가 떠난 후, 최성묵은 부민협 회장을 맡아 6월항쟁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싸웠으며, 부산의 민주화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성묵의 헌신과 리더십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민주화의 길을 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처럼 최성묵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부산의 변화를 이끌었던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노력은 현재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희망을 상징하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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