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유신체제의 붕괴는 많은 이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안겼습니다. 그러나 12·12 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그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동교동의 김대중 전 의원과 대구의 백현국 등과 함께 시국을 논의하며 민주화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민주화 세력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5·17 계엄 확대 이후, 김대중과 최성묵은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신군부는 민주화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속하며 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광주에서 5·18 민중항쟁이라는 거대한 저항으로 이어졌습니다. 부산에서도 활동가들이 진상 폭로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체포되는 등, 민주화의 열망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5·18 항쟁이 격화되던 5월 25일, 최성묵은 중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형사대가 교회에 들이닥쳐 박상도를 검거하려 했지만, 박상도는 이미 서울로 피신한 상태였습니다. 최성묵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즉시 서울로 피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김성재의 집에 있었고, 이후 최목사의 연락을 통해 YMCA 호텔에서 박상도와 만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최성묵은 호텔 방에서 박상도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순간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수배 중인 상태에서 병원에 갈 수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이규상 목사의 도움으로 캐나다 선교사와의 연락이 이루어졌고, 급히 택시를 불러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병원의 혈압 권위자 이응구 박사는 최성묵이 조금만 늦었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생사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최성묵은 신분 노출을 우려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일 민주화운동 보상에서 제외되는 불상사도 겪었습니다. 그의 친구 박상도는 최성묵의 곁을 떠날 수 없어 이틀간 병원 밖 벤치에서 잠을 잤습니다. 6월의 밤이슬 속에서 그는 최성묵의 회복을 기원했습니다. 이후, 최성묵의 아내 김순이에게 연락을 취해 그녀가 세브란스병원으로 오게 되었고, 그들은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퇴원 후, 최성묵은 그의 누님이 사는 집 근처에 방을 얻어 김순이의 간호를 받으며 회복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수상한 인물은 무조건 신고하라는 방송이 나오는 시기였기에 방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성란이 근무하는 학교의 동료 교사 집에서 방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최성묵은 병원에서 퇴원할 때 보행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 있었지만, 김순이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서서히 회복해갔습니다. 그리고 5·17 쿠데타 이후 두 달 반이 지난 1980년 7월 말, 그는 부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의 귀환은 단순한 개인의 회복을 넘어, 민주화의 길을 위해 싸워온 이들의 희망과 연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난의 연대기를 넘어, 민주화의 여정에서 희망과 회복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은 결국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의 일부였으며, 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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