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담임목사로 계셨던 중부교회는 정말로 특이한 교회였습니다. 암울했던 유신 시대와 살벌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시국을 논의하고 고민을 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성묵 목사님은 전국의 청년들과 기독교장로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예장, 고신,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 타종교 성직자들, 심지어 무신론자들까지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용기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셨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이기택, 박관용 등 당시 야권의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시대 정의에 반하는 판결에 대항하던 김광일, 노무현, 이흥록 변호사, 그리고 함석헌 선생님, 김정준,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홍근수 목사, 한완상 교수, 김동수 교수, 송기현 신부, 차선각 선생 등 많은 지성인들이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민주화 일선에서 노력했던 박상도, 김재규, 김형기, 여창호, 김재천 등의 이름도 여기서 모두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논의가 격화되던 시기, 김상근 목사님은 서울에서 자주 내려와 선생님과 정국 현황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현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부산에 오시면 여신도 회원들과 자주 기념촬영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이 계신 중부교회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막의 쉼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1990년 1월, 선생님은 설교 말씀에서 이스라엘 시대의 왕과 국민의 관계, 남북 왕국의 멸망과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설명하시며 “김영삼 씨는 6개월 전과 지금의 말이 다른 한순간의 변절자”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선생님은 민주화 과정 중 ‘부마 항쟁’과 ‘6월 항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피로로 인해, 성분도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하셨습니다. 대수술과 생명이 위태로운 고비를 넘기신 뒤에도, 담당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전두환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지속하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선생님!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조금 쉬시며 후배들을 독려하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괜찮아!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 마라”라고 하시며 특유의 웃음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의 건강은 극히 악화되고 있었으나, 사모님을 포함하여 누구의 말씀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거제도 애광원(김임순 원장)의 행사에 참여하고 오셨을 때, 나의 아내가 염려하던 말이 생각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아무 일 없어! 나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선생님 육성을 듣는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그분이 남긴 발자취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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