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팔관회와 그 역사적 의미

고려시대의 팔관회(八關會)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민심을 결집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1010(현종 1) 1115, 고려가 거란의 대군의 침략을 앞두고 팔관회를 개최한 사실은 이 행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략 조짐을 감지하고, 강조(康兆)를 최고사령관으로 하여 30만 군사를 통주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거란은 사신을 억류하고 침략을 통보하며, 결국 1116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현종은 팔관회를 개최한 이유는 무엇일까?

 

팔관회의 역사적 배경

팔관회는 원래 불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한 법회로 시작되었다. 신라 진흥왕 12(552)에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이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회를 연 것이 팔관회의 첫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는 건국된 해인 918년부터 팔관회를 개최하였으며, 성종과 원 간섭기 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팔관회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는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로,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팔관회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심을 결집시키려 했다. 팔관회는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팔관회와 민심 결집

팔관회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민심을 결집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993(성종 12) 거란의 1차 침략 당시, 문신 이지백은 팔관회와 같은 전통행사를 통해 민심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종이 30년간 중단된 팔관회를 부활시킨 배경이 되었다. 팔관회를 통해 현종은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것이다.

 

팔관회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거행되며, 개경에서는 1115, 서경에서는 1015일에 열린다. 첫째 날인 소회(小會)에서는 국왕이 태조의 초상에 배례하고, 태자와 왕족, 중앙 관료들이 국왕에게 절을 올린다. 이는 전통 농경 의례의 조상 숭배 의식과 제천 의례를 계승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둘째 날인 대회(大會)에서는 외국 상인과 추장들이 국왕에게 절을 올리고, 그들이 가져온 토산물을 바치는 의식이 진행된다.

 

팔관회의 문화적 의미

팔관회는 고려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반영하는 행사였다. 고려는 불교, 도교, 유교, 산신 및 조상 숭배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가운데, 팔관회는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며 민심과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팔관회는 고대 원시 농경 의례에서 출발한 제천의식과 신라의 선풍, 불교 의식 등 토착적이고 고유한 의례와 풍습을 계승하고 있었다.

 

팔관회에서 선랑(仙郞)으로 선택된 자는 용, 봉황, , 코끼리의 모습을 한 수레를 타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가 노래와 춤을 추며 따랐다. 이는 매년 하늘의 신이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불가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팔관회가 신라의 낭가사상과 불교가 융합된 행사임을 보여준다.

 

결론

고려의 팔관회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심을 결집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전쟁 전야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팔관회를 개최한 현종의 결정은,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팔관회는 고려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통합하며,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중요한 의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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