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교사들의 헌신,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 선교사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140년 전, 조선은 서구 사회에서 ‘호랑이가 출몰하고, 말라리아가 성행하는 위험한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부부가 일본을 거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면서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어요.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내렸고, 조선에 첫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이들이 조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조선은 현대식 의료 시스템이 전혀 없는 위험한 나라였고, 풍토병이 만연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선에서의 사역을 결심했습니다. 한국 개신교 140주년을 맞아, 최근 미국 동부를 탐방하며 초기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와 교회, 신학교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뉴저지 브런즈윅 신학교에는 언더우드홀이 마련되어 있는데,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공부하며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신학생으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이 학교는 프린스턴 신학교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언더우드는 교수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였어요.

아펜젤러는 드류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조선에 도착한 후 5년이 지나면서 체중이 80kg에서 60kg으로 줄어들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죠. 1900년, 아펜젤러가 안식년을 얻자 동문이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했을 때, 그는 “미국에서 천국 가는 게 조선에서 천국 가는 것보다 더 가깝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군산 앞바다에서 다른 배와 충돌하여 실종되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찾지 못했고, 미국의 고향에도,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도 빈 무덤만 남아 있습니다. 아펜젤러가 세운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교훈인 “크게 되고자 하거든, 마땅히 남을 섬겨라”는 그의 삶의 철학을 잘 나타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소속으로, 주로 한양과 수도권에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은 왕실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한 이지적이고 엘리트적인 선교 방식을 취했죠. 반면, 남장로교 소속의 초기 선교사들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교회를 세우고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전킨 부부, 레이놀즈 부부, 테이트 남매 등은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 헌신적인 사역을 펼쳤습니다.

전문가들은 “전킨 선교사는 풍토병으로 어린 아들 셋을 잃고, 자신도 결국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이들의 헌신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척박한 땅에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젖힌 이들로, 그들의 무기는 박애와 열정이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의 의료계와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은 한국 근대화와 정신적 민주화에 기여했죠. 연세대학교(1885년 설립), 이화여자대학교(1886년 설립), 세브란스병원(1885년 설립) 등은 그들의 헌신의 결과물입니다.

일부 좌파들이 조선에 온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들의 헌신적인 사역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조선에서의 사역은 그들의 삶을 바친 결과이며,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부와 명예를 떠나, 오직 조선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입니다.

결론적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헌신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우리는 그들이 남긴 유산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헌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졌음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그들의 정신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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