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지하철사업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쟁과 기회

최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의 철도차량 제작업체인 현대로템이 5,300억원 규모의 지하철 사업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는 현대로템의 해외 첫 수주 실적이지만, 한국 기업들과 정부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전체 발주 규모가 1조 3,000억원에 달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한국 기업들은 핵심 설계 및 시공 사업권을 놓치고 차량 공급만 따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마닐라 내 케손시티 노스 에드사역과 불라칸주에 있는 산호세델몬테역을 연결하는 신규 노선 건설사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우건설은 설계·조달·시공(EPC) 사업을 맡고, 현대로템은 차량 공급을 담당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필리핀 정부의 민관합작사업(PPP)에 응찰했으나, 필리핀 정부는 일본에 EPC 사업권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국제입찰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일본의 로비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은 필리핀 인프라 시장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지난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필리핀에 20억 달러 규모의 철도 건설 차관을 제공하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 인해 필리핀 남북을 잇는 100㎞ 연장 철도 건설 사업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필리핀에 대외경제협력기구(EDCF) 차관을 포함해 총 8000억원을 지원했지만, 일본의 지원 금액은 한국의 50배에 달합니다. 일본은 필리핀의 연간 대외 공적개발지원금 중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사적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지원 인력 면에서도 한국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 수출입은행 마닐라 사무소에는 한국인 소장과 부소장 2명, 현지 채용 인력 2명이 있는 반면, 일본 수출입은행과 일본국제협력기구(JICA)는 본국에서 온 인력만 12명 이상이며, 현지 인력을 포함하면 50명을 넘습니다. 정보력에서 한국은 일본에 비해 크게 열세인 상황입니다.

장기 전략에서도 일본은 훨씬 치밀합니다. 일본은 필리핀 정부와 엔 차관 계약을 체결할 때 '타이드'(프로젝트 물자 조달을 자국 업체로 한정)와 '언타이드'(물자 조달을 정부 선택에 맡김) 조건을 혼합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자국 업체와 생산품을 활용할 수 있는 언타이드 차관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한국은 타이드 조건 차관만 제공하고 있어, 국내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국민 혈세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정치적 논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일본 퇴직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기술 문제를 해결하고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한일산업기술재단에 따르면, 일본 퇴직기술자의 도움을 받은 중소기업은 2008년 12개에서 2024년 66개로 증가했습니다. 이들은 제조공정 개선과 수출 확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과 일본의 민간 협력은 정치적 관계와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한·일 상생모델’이 구축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필리핀 인프라 시장에서의 경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한국은 이러한 도전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필리핀 지하철사업에서의 경쟁은 단순한 사업 수주를 넘어, 한국의 미래 인프라 시장에서의 입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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