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막칸과 졸본부여: 전설의 시작

고두막칸(高豆莫婁汗)은 졸본부여(卒本夫餘)의 시조로, 그의 통치 아래에서 북부여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고두막칸은 서기전 108년, 부여의 영지 대부분을 차지하며 졸본부여를 세우고, 그 시조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 해는 개천(開天) 3790년, 계유년(B.C 108년)으로,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기도 합니다.


고두막칸은 사람됨이 호준(豪俊)하고 용병(用兵)을 잘하여, 부여가 쇠약해지고 한구(漢寇)의 위협이 커지는 것을 보고 나라를 구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는 졸본에서 즉위하며 자호(自號)를 동명(東明)이라 하였고,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나라의 왕 유철(劉撤-漢武帝)은 우거의 서울인 임검성(壬儉城)이 있는 창려(昌黎)와 평주(平州)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망시켰습니다. 동명왕은 더 이상 한족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고, 스스로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두막칸 2년, 기해년(B.C 106년)에는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5,000명의 병사를 모았습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한구와 싸울 때, 도적들은 그의 깃발을 보고도 도망쳤습니다. 마침내 그는 가우리하(句麗河)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고, 이는 옛 가우리국의 땅이었습니다. 고두막칸의 승리는 고진(高辰)단군이 가우리후(高句麗侯)로 봉함을 받고 세웠던 원 가우리(元 高句麗)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 한무제(漢武帝)의 북진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으나, 고두막칸은 서쪽의 훈족(匈奴族)과 화해하고 강병을 길러 남쪽 국경을 지켰습니다. 이로 인해 쥬신의 영토에서 한구들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두막칸 22년, 갑오년(B.C 86년)에는 고우루를 왕에서 제후로 낮추고, 동부여(東夫餘)로서 지금의 훈춘(琿春) 땅으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가시라(加葉原)로 알려져 있으며, 청나라 때는 와지(沃沮)라고 불렸습니다.

고두막칸 30년, 임인년(B.C 79년) 5월 5일에는 고추무(高朱蒙)가 탄강(誕降)하였고, 고두막칸 49년, 신유년(B.C 60년)에는 칸이 붕(崩)하여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냈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황태자 고무서(高無胥)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고두막칸의 통치 아래에서 졸본부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의 전설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며 한국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고두막칸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닌, 고대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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