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벽란도: 국제무역의 중심지와 개성상인의 이야기

고려시대 벽란도(碧瀾渡)는 오늘날의 인천 송도 국제도시와 같은 세계화된 공간이었습니다. 수도 개경(개성)에서 약 30리 떨어진 황해도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고려의 제1항구이자 유일한 국제무역항으로, 송나라, 일본, 남양, 서역, 아라비아 반도와의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곳에서의 국제무역 활동은 주로 개성상인들이 도맡아 하였으며, 개성상단은 다른 상단보다 규모가 크고 상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벽란도는 고려의 대외 무역 발전과 함께 번성하였고, "KOREY"라는 이름으로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명성을 얻게 된 원동력은 송도 상인들이었습니다. 왕건을 중심으로 고려를 창건한 송도 상인들은 조선 개국 이후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은 송방 시스템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며 전국적으로 유통업을 장악했습니다. 송방은 개성상인이 운영하는 점포로, '송상(松商)'이라는 이름은 개성의 소나무를 상징하며 품질을 보장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개성상인들은 짠돌이 경영을 통해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재물은 공공의 성격이 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혼을 불어넣는 장인정신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았으며, 개성상인의 제품은 믿고 오래 쓸 수 있는 최상품의 품질로 인정받았습니다. 조선시대 한양 시전상인과 마찬가지로, 일부 개성상인들은 세금을 내고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소유하여 시전을 경영하였습니다.

1910년대까지 개성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존재했으며, 개성의 시전상인들은 16개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상호부조를 통해 협력하였습니다. 벽란도는 고려와 조선 시대 약 800년 동안 개성상인들이 송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형성된 국제 사무역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철도와 육로가 발달하면서 벽란도의 기능은 감소하였고, '벽란리'라는 지명조차 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개성상인들은 독립군 자금을 제공하고 독립군의 이동을 돕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개성상인들의 인삼 수출권을 박탈하고, 외국 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들여와 민족자본을 말살하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상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벽란도는 예성강 하류에 위치한 마지막 나루터로, 고려시대 수도 개경과 가까워 국제 항구로 발전하였습니다. 벽란도는 외국 사신과 상인들이 빈번히 왕래하는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12~13세기에는 인구가 50만에 이르렀고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왕래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 상권은 베니스보다 2세기 앞섰으며, 고려가 영어로 '코리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결론적으로, 벽란도는 고려시대의 국제무역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개성상인들의 노력과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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