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최성묵 목사님은 부산-YMCA 총무로 재직하셨습니다. 당시 부산-YMCA의 이사장은 재벌인 성창목재의 정태성 장로님이셨고, 이사진의 구성도 교육대학의 우창웅 교수 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사들과의 충돌이 잦았던 최성묵 목사님은 "나는 가방모찌가 아니다"라는 입버릇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최핏대"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
부산-YMCA 총무로서 최성묵 목사님은 재정적 어려움과 활동상의 제약을 겪으셨습니다. 제가 부산-YMCA 대학-Y써클 영봉회장과 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1972년부터 1975년까지의 기간은 유신헌법으로 인해 관계 기관의 통제와 사회적 긴장감으로 부산에서의 YMCA 활동에 많은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자율적으로 써클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는 특정 목적의 의식화 교육을 강요하기보다는 우리가 하고 싶은 사업에 대해 간접적으로 교훈을 주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일본 청산학원'과의 한・일 대학생 역사 교류, 동래구 BBS 청소년 야간 교육, '조국강산순례행군대회', 부산 KSCF와의 협력관계 구축, 그리고 부산시내의 걸인 및 불우 청소년 실태조사를 위한 방문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1975년 김인환 선생과 함께 '부산지역 대학생협의회'를 결성하고, 1976년 겨울에는 박상도 형과 함께 부산 '청년-Y'를 결성하였습니다.
1975년 봄, 정외영이라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1학년 여학생이 대학-Y 써클에 가입하고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똑똑하다는 인상과 함께 당돌함과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제 지식과 시국 개념이 부족했기에, 최성묵 목사님께서 자문을 받고 있던 한국기독학생연맹(KSC)의 차선각 총무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차선각 총무는 60년대 초 SCM 시절부터 최성묵 목사님과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누어온 사이였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정외영 씨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켜보셨고, 그녀가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지명수배로 피난처가 필요할 때 서울의 한 교수님 집에 피신시키는 자상함을 보여주셨습니다.
1975년 겨울, 유신 탄압이 심각해지던 시기에 저는 선생님의 자문으로 학생․청년으로 구성된 51명이 제주도로 행군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주최 목적은 당시 유신 정부가 사회운동단체에 지원하여 개최하던 학생 행군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남녀 학생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과 혼숙을 하며 13박 14일의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행군 4일째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모인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유신반대" 구호를 외쳤던 일입니다. 급기야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함께 "유신반대"를 외치며 집회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부산-YMCA 중심의 젊은이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부산-YMCA 총무로 재직하며, 최성묵 목사님은 부산-YMCA 사회체육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이 발전은 현재 부산시 사회체육센터의 오동석 사무총장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선생님은 오동석 형의 사회체육에 대한 신념과 비전을 높이 평가하여, 어려운 부산-YMCA 살림살이 속에서도 현재 부산-YMCA 건물의 옛터 뒤편에 단층 건물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체육 지도자들이 양성되었고, 새로운 부산 시민을 위한 사회체육 시스템이 계획되었습니다. 당시 참여했던 김길구 선생은 현재 부산-YMCA 사회체육 시스템의 운영 책임자입니다. 오동석 형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부산 사회체육 운동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이면에는 선생님의 신념과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76년 겨울, 대학교 4학년 졸업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당시 부산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선생님을 따르던 청년들과 학생들 사이에는 김재규 사건 등으로 인해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으로 원치 않는 감옥에 잡혀가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최성묵 목사도 이제 감옥에 가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저는 선생님과 충무동의 한 선술집에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비굴하지는 않지만 독재 정권과 싸울 용기가 없으며, 내가 원하는 길을 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정색을 하시며, "이놈아! 언제 내가 감옥에 가라고 했느냐,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했지!"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길, "우리 인생은 유한하다. 언젠가 하나님이 거두어 갈 생명이다. 민주시민으로서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고기가 되어야 한다. 어떤 지위에 있거나 상황 국면에서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의 말씀은 내 인생의 기본 지침이 되었고,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 한국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희망과 변화를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이며, 그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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