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성묵 목사님의 삶과 유산

고 최성묵 목사님은 인간적인 면모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는 경북 포항시 위에 위치한 흥해읍의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기택 민주당 전 총재는 흥해 위의 청하 출신이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동향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교 집안에 시집오셔서 아버지를 흥해교회 장노님으로 올리셨는데, 이는 그가 상당히 개화된 분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당시 대학생이던 나에게 이웃 사랑에 대한 사례로 포항제일고등학교 3학년 학도호국단 단장 시절의 경험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19506.25 전쟁 중, 인민군이 고향 흥해와 포항을 점령하면서 그는 반동적인 요소로 여겨져 공개 총살형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는 총살 집행을 당한 후, 하염없이 울부짖는 새벽 풀벌레 소리에 눈을 떠 보니 피범벅이 된 몸으로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간신히 총살 현장을 기어 나와 지나가던 사람의 소달구지에 실려 가족에게 알려졌습니다.

죽는 줄 알았지만 혼자 살아남은 최성묵 목사님은 한 여학생(지금의 부인)과 집안 어른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천신만고의 수술 과정을 거쳐 생명이 보전되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 이후 국군의 북진으로 인해 부대가 후퇴하면서 그는 고향이 점점 멀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산 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창틀 너머로 어둠이 내릴 때, 그는 허름한 창고에서 찬송가를 소리죽여 불렀습니다.

그때 누군가 간호원에게 "최선생! 예수쟁이야?"라고 물었고, 그는 당황하며 "! 조금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 최성묵 목사님은 주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며, 초겨울 어느 지역에서 미군 폭격으로 혼란스러운 야전병원에서 탈출하여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상을 입은 몸으로 산길을 헤매는 날들을 반복하면서도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남하하던 중, 충청도의 숲길에서 국군 부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남루한 인민군 야전작업복장을 입고 있었고, 총살의 후유증으로 몸이 휘어진 상태였습니다. 생포된 후 소대장은 "당신이 정말 인민군이냐"고 물었고, 그는 "나는 인민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포항제일고등학교 3학생이며, 크리스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대장은 그에게 찬송가를 부르라고 했고, 최성묵 목사님은 허리를 움켜잡고 힘을 다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 결과, 소대장은 그를 국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약간의 용돈과 함께 작전지역까지 후송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어렵게 고향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귀환한 최성묵 목사님에게 국군과 미군이 찾아와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지나온 활동 내역에 대한 질문과 함께 동네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적색분자 또는 부역자를 찾아내라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아! 원수를 사랑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공회당에 늘어선 사람들 앞을 지나면서도 한 사람도 잡아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사건들이 있은 후 몇십 년이 지난 1970년 초, 그는 부산 YMCA에서 총무로 일하던 시절, 미국 국무성 담당자가 "최선생! 당신의 경력조사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선생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선생을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후, 최성묵 목사님은 흥해읍에서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문과대학 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교회에 교인이었던 김순이 여사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울의 단칸방에서 시작했으며, 이후 가정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선생님은 자유당 독재 시절, 1953년 한국기독교장노회와 한국신학대학을 설립한 김재준 박사가 포항에서 설교를 위해 장소를 빌리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외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학교 강당을 제공하셨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김재준 박사에게 큰 감명을 받은 최성묵 목사님은 서울대학교 수학과 졸업의 미련을 버리고 한국신학대학교로 입학하게 됩니다.

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 한국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 속에서 희망과 변화를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이며, 그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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