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우리는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51명으로 제주도 행군 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유신 정부가 지원하던 사회 운동 단체의 학생 행군 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녀 학생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을 하며 혼숙(?)을 하고, 13박 14일 동안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빠른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며 “유신 반대!”를 외쳤고,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유신 반대를 위한 집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많은 부분 술을 공짜로 주는 헤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부산 YMCA 중심의 젊은이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YMCA 총무로 재직하시던 선생님은 많은 학생과 청년들, 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YMCA 대학 클럽 회장이라는 신분 외에는 특별한 지식이나 시국관이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로마 클럽 보고서’를 통해 지구의 여러 문제(자원의 고갈, 환경 문제, 인구 폭발과 식량 문제 등)와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흥미를 가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또한 토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 제가 접해보지 못한 난해한 문학적인 부분도 일깨워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196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청년 문화”와 미국의 변화(마틴 루터 킹 목사 이야기), 공업화와 산업화의 문제점, 정보 지식 사회의 도래와 21세기 전망 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호기심과 자존심이 발동하게 되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뒤로 한 채 처음으로 밤샘을 하면서 관련 서적을 흥미롭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돈을 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을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모님의 “돈 못 벌어온다”는 평범한 바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없는 돈에도 시간이 나면 저를 부산 광복동의 미화당 근처에 있는 허름한 술집으로 데려가 술을 사 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에게 종교와 신학, 세상을 보는 눈과 인생살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통행금지가 넘는 통에 집으로 모시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못난 사람에게 그토록 많은 교육을 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는 너무 놀랐습니다. 당시 선생님 댁은 너무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대청동 대청장 예식장 밑 골목 안의 허름한 2층 집 다다미방에는 조개탄 스토브가 방 한가운데 있었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오래된 논문집과 잡다한 책들, 낡은 피아노와 전축을 빼고는 아무 가재도구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좁은 방에 해림, 해성, 해원, 해광 네 자매와 사모님, 그리고 선생님과 제가 함께 잠을 청하기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제대로 된 부엌도 없는데도 사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받으며 실로 미안한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모님의 어떠한 말에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일상은 중부교회에서 목회하시기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저를 포함하여 많은 청년들에게, 즉 모든 것이 어수선한 귀신(貴臣)들이 아닌 귀신(鬼神)과 같은 이들에게, 당시 정신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오갈 곳 없이 거리를 헤매던 청년들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정통한 신 르네상스인을 만들기 위해, 틀에 박힌 거대한 건물이나 특정 장소보다는 허름한 시설이나 주로 술집에서 주(主)님 대신 주(酒)님을 모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노력은 특정 사람뿐만 아니라, 당시 주변 사람들의 무식하고 갇힌 이념들을 현실적으로 해방시키고, 이론과 실천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일반적인 모습 중 하나였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술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에게는 이해를 촉구하고 싶습니다.)
부산 YMCA 총무 시절, 부산 YMCA 이사장은 당시 부산 재벌인 성창목재 정태성 장로님이셨고, 이사회의 구성도 교육계의 우창웅 교수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사진들과 종종 충돌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는 가방모찌가 아니다”라는 입버릇으로 말씀하시며, ‘최핏대’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부산 YMCA 총무로서 재정적인 어려움과 활동상의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제가 대학 써클 회장과 연합회 회장으로 있는 기간은 유신 헌법으로 인해 관계 기관의 통제와 사회적 긴장감, 이사회의 간섭으로 YMCA 활동에 많은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들의 자율적인 써클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특정 목적의 의식화 교육을 강요하기보다는 우리가 하고 싶은 사업에 대해 간접적으로 교훈을 주셨습니다. 부산시의 걸인 및 불우 청소년 실태 조사(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공동조사), 일본 청산 학원과의 한일 대학생 교류, 부산 지역 대학생 협의회 결성, 부산 청년-Y 결성 등의 여러 사건이 기억에 남습니다.
1975년 봄,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으면서도 야무진 입술과 힘 있는 눈을 가진 부산대학교 사학과 1학년 정외영이라는 여대생이 대학-Y 써클에 찾아왔습니다. 당시 제 지식과 시국관으로는 정양의 질문과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써클 전체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선생님의 자문을 받고 있던 부산 KSCF(한국 기독 학생 연맹)의 차선각 총무와 학생 간부인 조성삼, 김영일, 조태원 군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차 선생은 ‘KSCF’ 전신인 ‘SCM’ 시절인 60년대 초, 선생님과 학생 간사와 학생 대표로 만나 오랜 세월 형님과 동생처럼 우정을 다져온 사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정양을 지속적으로 지켜보셨던 모양입니다. 그 후, 정양은 민주화 운동에 많은 활동을 하다가 지명 수배로 거처 마련이 힘들 때, 선생님께서는 서울의 친구인 어느 교수님의 집에 피신시키는 자상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기억들은 선생님이 보여주신 리더십과 인간적 따뜻함이 저와 많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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