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님은 서울에서 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 운동에 참여하시며, 주변의 추천으로 연세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교 구약 분야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서울생활은 집안의 반대와 박봉으로 인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의 끼는 결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서울 의대의 박상증 선생과 차선각, 오재식 선생 등 친구들과 후배들은 힘을 합쳐 KSCF의 전신인 SCM 총무직을 수행하며 한국 기독청년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박상증 선생은 "최선생은 평소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회상하며, 자신이 가진 전축을 부러워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후, 박상증 선생이 스위스 WCC로 부임하면서 차비 부족으로 저렴한 가격에 전축을 최성묵 목사님에게 판매했습니다.
선생님은 이후 이화여고 교장과 국회의원을 지내신 정모 여사와 함께 청년 기독단체를 결성하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인식 부족과 활동비용의 부족으로 어려운 생활이 지속되었습니다. 차선각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약속한 후원비용보다 활동비가 많아지면서 운영비를 내겠다고 한 정모 여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빚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는 겨우 살던 집의 전세비용으로 단체의 빚을 갚고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부산 YMCA 총무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많은 학생 및 청년들과 지역의 뜻 있는 인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나는 그 당시 부산 YMCA 대학 영봉클럽 회장이라는 신분이었으나, 이렇다 할 만한 의식이나 전문지식이 부족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최 총무님은 가끔 나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교 공부와 전문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경영학도는 경영학도다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탁월한 예지능력과 새로운 경영학에 대한 흥미를 가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당시 '로마클럽보고서'를 통해 지구의 제반 문제(자원의 고갈, 환경문제, 인구 폭발과 식량 문제 등),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피터 드러커의 '단절의 시대',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와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등을 언급하며 경영학도가 그렇게 무식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셨습니다. 그는 1960년대 새로운 문화의 충격으로 발생한 "청년문화"와 미국의 경찰 국가 역할, 시민운동, 마틴 루터 킹 목사, 한국의 공업화와 산업화에 따른 환경공해, 정보 지식 사회의 도래와 21세기 전망 등에 대해 말씀하시며, 당시 나로서는 충격적이었던 그의 말씀에 호기심과 자존심이 발동했습니다.
선생님은 돈을 버는 데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부분까지 가르쳐 주셨으면 하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모님의 "돈 못 벌어 온다"는 평범한 주부의 바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없는 돈에도 시간이 나면 부산 광복동의 허름한 술집에서 나에게 술을 사 주시며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사랑을 토해내곤 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단순한 일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통행금지가 넘는 상황 속에서 나를 집으로 모시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나는 선생님 댁에 가서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 댁은 매우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중구 책방골목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대청동의 허름한 2층집이 있었고, 방 하나에는 오래된 다다미와 조개탄 스토브가 있었습니다. 방 안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오래된 논문집과 잡다한 책들, 낡은 피아노와 전축 외에는 가재도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좁은 방에서 해림, 해성, 해원, 해광 4자매와 사모님, 그리고 선생님이 거주하셨습니다. 특히, 나와 같은 가족 외의 사람들이 잠을 청하기란 만만치 않은 장소였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면, 제대로 된 부엌도 없는데도 사모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받으며 미안한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모님의 어떠한 말에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상은 중부교회에서 목회하시기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교리문답 시간에 구약과 신약에 대해 교인들과 학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그는 구약의 시편과 신약의 마가복음을 좋아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신약은 예수 사후인 AD 50년에서 60년 이후부터 편찬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마가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교회 등 동방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설교 중에 인용되는 경우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외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영지주의와 새로운 복음서 발견에도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선생님은 과거 예루살렘 시대의 역사적 인간 예수를 철저히 따르며, 지금의 시대정신으로 계승하려는 소명의 정신을 일관되게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셨습니다. 많은 당시 소외된 사람들과 버림받거나 착취당하던 이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특히 시대를 고민하던 학생들과 청년, 장애인들을 귀하신 몸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의 노력은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 사람들의 시대 감각이 부족했던 이들에게 넘치는 카리스마와 호기심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틀에 박힌 이분법적인 논쟁보다는, 닫혀 있는 청년들의 마음을 현실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가 보여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 한국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희망과 변화를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이며, 그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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