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동성왕과 북위 전쟁: 대륙 지배의 역사적 사실

서기 490년,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은 북위(北魏)와의 두 번째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동성왕이 남제(南齊)에 보낸 국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북위는 수십만 명의 기병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왕은 장수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북위군을 기습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북위가 동원한 병력의 규모입니다. '수십만'이라는 표현은 최소 2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서기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끌고 온 13만 대군보다도 많은 수치입니다. 이러한 대군을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시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중국의 주력 전함인 누선(樓船)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하여 먼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송나라 시기에 저술된 『무경총요(武經總要)』에서는 누선이 폭풍을 만나면 제어하기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위가 이러한 배를 이용해 황해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동성왕은 490년 전투에서의 승리를 495년에 국서를 통해 알렸습니다. 그는 북위군의 시체가 들판에 쌓이고 피로 들판이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하며, 전투의 참혹함을 강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4명의 장수는 각각 정로장군(征虜將軍), 안국장군(安國將軍), 무위장군(武威將軍), 광위장군(廣威將軍)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장수의 군공 중 목간나가 “항구와 배들을 빼앗는” 군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일부에서는 북위가 해군을 동원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중국의 전함들은 바다에서의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북위의 주력군은 기병, 즉 육군이었으며, 이들이 바다를 건너 상륙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전투에 참여한 다른 장수들, 예를 들어 낙랑태수 모유(慕遺)와 성양태수 왕무(王茂), 조선태수 장새(張塞) 등도 동성왕의 군사 작전에 기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백제의 군사적 승리를 이끌어낸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이제 이들 장수가 봉해진 지역과 나머지 태수들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이들 장수가 한반도 내에서 왕과 제후로 봉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근거가 부족한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사법명의 영지인 매라에 대한 주석은 매로와 관련된 지명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찬수류의 영지인 벽중 역시 전라북도 김제군과의 연관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단순한 발음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백제는 서기 490년 북위와의 전쟁을 통해 오늘날 중국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석권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8명 장군들은 모두 해당 지역에서 왕과 후작으로 봉해졌으며, 이들은 백제의 대륙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은 백제를 한반도 내로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였고,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악용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주장을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주류 강단사학자들입니다.

북위의 성양군은 현재 중국 산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위의 성양군은 두 곳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하남성 주마점(駐馬店)시 비양현에, 다른 하나는 하남성 신양시 동북쪽에 있었습니다. 이들 중 백제의 성양군은 산동성의 성양군으로, 동성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북위가 성양군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남성에 제2의 성양군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성양군의 위치는 일조(日照)시 거현에 해당합니다.

서기 490년,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당시 수도인 평성(平城, 현재의 중국 산서성 대동시)에서 출발하여 태원분지를 거쳐 하남성으로 내려온 후 산동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낙랑태수 모유, 조선태수 장새, 성양태수 왕무 등이 지원하였고, 백제 중앙정부는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에게 군사를 주어 북위군을 남북 양면에서 협공하여 격파했습니다. 목간나가 북위의 항구와 배를 빼앗은 군공은 황하에서의 수전(水戰)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백제 동성왕과 북위 전쟁은 백제의 대륙 지배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전쟁의 결과는 백제의 군사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의 역사적 위상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계의 태두인 고 이병두 박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은 '한반도의 백제가 중국 만주까지 말을 타고 북위와 전쟁을 치루었다'고 주장하거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 가설이 모두 말이 된다고 보나요? 정말 한심한 역사학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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