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륙 진출과 백제향의 역사적 의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후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리게 되면서 백제는 요서를 통치하게 되었고, 이를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백제의 대륙 진출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진평현의 역사적 배경
남조의 송나라가 설치한 진평현은 남제 때까지 이어졌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 점령당했음을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평현이 광서장족자치구에 있었다는 기록은 백제와의 연관성을 시사합니다. 특히, 광서장족자치구의 남령시 옹령구에는 지금도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요?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지리연구소장 진가위 교수는 “허(墟)”라는 이름이 오래된 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백제허 지역은 실제로 백제 사람들이 살았던 곳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이는 백제의 옛 성이 있었으나 멸망 후 폐허가 되어 백제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백제향의 문화적 유산
광서장족자치구 백제향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주 오래 전에 산동 지방에서 내려와 정착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지역을 중국어 발음인 ‘바이찌썅(Bǎijǐxiāng)’이나 ‘대백제’라고 부르며, 이는 백제와의 연결 고리를 암시합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맷돌과 외다리방아는 전라도 지역의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쌍다리 방아를 주로 사용하지만, 전라도와 일본, 백제향 지역에서는 외다리방아를 사용합니다. 이는 이 세 지역이 백제라는 대제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백제향 주민들은 자신들이 산동 지방에서 장사하러 왔거나 전쟁 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일부 사람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부흥운동을 전개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반론과 재반박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합니다. 순천향대학교의 박현규 교수는 백제허의 “허(墟)”가 장터를 의미하며, 이 마을은 청나라 때인 1764~182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백제라는 이름이 장족의 말을 음차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백제허의 지명이 장족 언어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국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관련된 지명들을 동북쪽으로 밀어내거나 연혁을 조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나라의 국호에 대한 기록에서도 신라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사례가 있습니다.

백제의 대륙 진출과 역사적 정체성
중국의 역사서인 양서, 구당서, 남재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백제의 최초 건국지는 현재의 중국 북경과 조양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대륙에 담로들이 통치하는 대륙 백제가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백제의 대륙 진출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을 넘어,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적 유산을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백제향의 지명과 문화적 유산은 백제의 대륙 진출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백제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도 백제와 관련된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 그 숨겨진 면모가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백제의 대륙 진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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