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민주화의 길에서의 고난과 저항

1980년대 초, 전두환 군부 집단은 광주학살의 피비린내 속에서 권력을 탈취하며 제5공화국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폭력과 왜곡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고, 신군부는 집권 초기부터 잠재적 도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용공 조작 사건을 일으키기로 작정했습니다.

1981년 9월, 부산에서는 ‘부림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학생, 종교인, 재야세력을 포함한 22명이 검거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입니다. 경찰은 이들을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 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엉성하게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체로 1970년대 중부교회와 양서협동조합과 관련이 깊었으며, 최성묵 목사와 가까운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최성묵은 이들의 가족들과 함께 석방 운동에 적극 나섰고,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법정에서 활약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다음 해인 1982년 3월에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고신대, 부산대, 부산여대 학생들이 연루되었으며, 5·18 항쟁에 참여한 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한 김현장이 부산 대학생들과 만나면서 계획된 사건이었습니다. 5·18 항쟁을 통해 제기된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이 사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반공 친미 의식에 젖어 있던 사회에서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운동 내에서 ‘조직적 반미 자주화운동의 효시’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돌출적이고 비대중적인 모험주의’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주동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이 보수 교단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의 학생들이라는 점은 한국 기독교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주동 인물 중 하나인 문부식은 고신대 신학과 3학년 학생이었고, 그의 동지인 김은숙은 기독교 교육학과 2학년생으로, 두 사람 모두 중부교회에 다니며 최성묵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최성묵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독일 신학자 본 회퍼를 인용하며 "미친 운전수가 운전하는 것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김현장도 광주 출신으로, 자주 부산 중부교회를 찾으며 최성묵 목사와의 인연이 깊었습니다. 또한 중부교회 청년회 회원인 허진수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물론 최성묵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그와의 관계를 추궁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김현장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경찰이 최성묵 목사와의 관계를 추궁했음을 증언했습니다. 경찰은 "최성묵 목사에게 용돈을 얼마 받았느냐"고 물었고, 이에 김현장은 "1천만원 밖에 안 주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이 "어느 놈이 돈 1천원을 줄 턱이 있노, 거짓말 아이가?"라고 되묻자, 그는 웃으면서 "1천만원이요"라고 대답했다고 전했습니다.

부림사건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고난과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단순히 개인의 고난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 열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성묵과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민주화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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