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 홍씨와 홍노: 충신의 혼과 전통 마을

부림 홍씨 집안은 고려 태조 왕건의 친필인 백원첩(白猿帖)이라는 귀한 보물을 전해 받고 있습니다. 이는 왕건이 916년 궁예의 태봉국을 공격할 무렵에 쓴 글로, 정몽주가 이를 유희억에게서 얻은 후 문중에 전해졌습니다. 이 글씨는 태조 왕건의 필적을 통해 당시 문사들이 남긴 연시와 연결되어 부림 홍씨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홍노의 생애와 충성
부림 홍씨의 선조인 홍노(洪魯, 1366~1392)는 조선이 개국한 날, 즉 고려가 망하던 날에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려 왕조의 멸망을 예감하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며 머리를 다듬은 뒤, 태조 대왕을 꿈에서 뵈었음을 전하고 "오늘 돌아가리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그는 사당에 배알하고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린 뒤, 마당에 나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방에 들어가 사망했습니다. 홍노는 고려의 마지막 날에 맞춰 운명한 셈입니다.

홍노의 죽음은 그가 국가와 함께 죽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며, 그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7월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고려를 기리는 의미로, 그의 충절이 여전히 기억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전통 마을과 문화유산
홍노가 살던 마을은 현재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로,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곳으로,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는 8만9암자가 존재했으나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인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대율리에는 홍노를 기리는 비석과 그의 후손인 홍천뢰 장군의 비석도 세워져 있습니다. 마을의 돌담은 두껍고 견고하여, 이는 홍노의 혼이 깃든 전통 마을의 자존심을 지켜줍니다. 마을 안에는 1632년에 건립된 대청과 홍노의 위패를 모신 종택도 있습니다.

홍노의 문학적 인연
홍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었습니다. 그는 7세에 효경에 통했고, 22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25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392년에 국운이 기울자 사직하고 낙향했습니다. 그의 충성과 문학적 재능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부림 홍씨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론
부림 홍씨와 홍노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들을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충성과 희생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홍노가 살던 전통 마을과 그곳의 문화유산은 그의 혼이 깃든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나 최근 개발 바람이 불고 있어, 이러한 전통이 사라질까 우려됩니다. 앞으로도 홍노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통 마을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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