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양을 통한 희생과 정의의 가치

1990년 10월 21일, 고 최성묵 목사님은 "속죄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본문은 판관기 11장, 이사야 53장, 마태복음 27장이었습니다. 이날은 문익환 목사님이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시고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전 방북 후 나라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컸던 시점이었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교회 사람들조차 문 목사님을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가 이룬 변화가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설교에서 목사님은 용기 없고 비굴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각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는 판관기와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이 위급할 때마다 하나님이 파견한 12명의 군인, 즉 12판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중 입다라는 인물은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 비적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압몬군의 침략을 받았고, 화친을 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압몬군을 이기면 처음 나오는 사람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압몬군을 이기고 돌아온 입다를 맞이한 것은 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두 달 동안 산에서 떠돌다가 돌아온 후, 아버지의 약속대로 번제로 바쳐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문제를 넘어 신앙심의 깊은 저의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이야기를 유대교 신앙의 전통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속죄양 제사에서 염소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죄를 봉하고, 다른 한 마리는 광야로 보내져 멀리 떨어뜨려집니다. 이러한 제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으로, 고대 문헌에서도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고대 문헌인 《서경》에서는 제사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으며, 일본의 《고사기》에서도 신에게 바치는 제사의 의미가 언급됩니다.

입다의 외동딸이 죽게 되는 상황은 그가 이긴 기쁨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서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비적의 대장이 되어 돌아온 외동딸이 꼭 죽어야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개선장군의 대가로는 너무한 희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쳐야 하는 이유를 질문했던 것처럼, “입다의 외동딸을 죽여야 하나?” 또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해 의로운 자들의 희생과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가스실은 인간의 복수심과 국가 권력, 그리고 못된 마음들을 심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인류가 겪은 비극을 상기시키며,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이러한 희생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였으며, 예를 들어,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도 희생 제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갇혀 있는 민주 인사들이 존재합니다. 간악한 지도자에게 심판을 강요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고 있는 그들은 이 나라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락하고 더러운 사회를 구원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의 희생양과 같은 존재로, 사회의 정의를 위해 희생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속죄양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희생과 구원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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