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주인: 바르 코크바의 난과 유대인의 저항

서기 132년부터 136년까지의 기간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반유대 정책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루살렘의 폐허 위에 세워진 신도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와 유피테르 신전의 건설은 그 상징적 조치였습니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발로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맞선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그 후의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배경: 서기 115~117년
유대인과 로마 제국 간의 갈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서기 115년부터 117년까지 진행된 제2차 유대-로마 전쟁에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파르티아 원정 중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로마 제국에 큰 피해를 주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의 문화와 종교적 관습을 억압하며, 예루살렘에 신도시를 세우고 유피테르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그들은 저항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2. 바르 코크바의 반란: 서기 132년
하드리아누스의 반유대 정책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바르 코크바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랍비 아키바에 의해 메시아로 선언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서기 132년 여름 또는 가을에 시작되어, 유대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에 주둔한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물리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3. 전투의 경과: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의 군대는 여러 동굴에 작전 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술을 통해 로마군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군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었고, 전투는 점차 격렬해졌습니다. 로마군의 초토화 전략은 유대인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었고, 많은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결국 135년, 바르 코크바의 난은 진압되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영구히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역사적 비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4. 이후의 영향: 서기 136년 이후
바르 코크바의 난 이후, 로마 제국은 유대인에 대한 철저한 억압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의 법과 관습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후에도 갈릴리와 다른 지역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며, 유대교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는 저항의 상징으로 여전히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현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론
바르 코크바의 난은 유대인 저항의 상징적 사건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압박에 맞서 싸운 저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적 기억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는 민족적 자긍심과 저항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오늘날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부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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