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4295년, 서기 397년 정월, 오오진천황(應神天皇)은 대별국에 도착하여 임시 궁을 세우고 망명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이곳은 후에 나라(奈良)라 불리며, 훗날 일본의 야마또(大和)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오오진천황은 곰나루를 되찾기 전까지 임시로 이곳에 머무를 계획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밝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나라에 알려졌습니다. 담덕태왕(談德太王)은 강력한 방어망이 구축된 영암 지역으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곰나루 함락을 기점으로 서둘러 회군하며 십제(十濟)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오오진천황은 담덕의 움직임을 잘 몰랐고, 담덕 또한 천황이 본토를 버리고 멀리 나라까지 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397년 5월, 오오진천황은 나라에서 모든 담로왕들을 소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제국은 지난 전란에서 담덕에게 항복한 일로 인해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신왕(阿莘王)은 사죄의 특사와 함께 전지태자를 보내 충성을 다짐했지만, 이는 담덕과의 성하지맹을 파기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한편, 천황이 떠난 밝지의 제국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본의 나라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서 전란 후의 수습과 복구작업이 차질을 빚었고, 위족(倭族) 출신의 많은 백성들이 천황을 따라 이민행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담로왕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 다물임나(多勿任那)로 몰려들었습니다. 천황은 위족들에게 절대적인 구심점이었고, 그의 존재는 하늘의 보호를 상징하는 초능력자로 여겨졌습니다.
399년, 개천 4297년, 호태왕 담덕은 남쪽국경의 방위 상태를 순찰하기 위해 남펴라(현재의 평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때 실라(新羅)로부터 특사가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밝지의 천황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나라 지역에 머물고 있으며, 위족을 중심으로 한 밝지의 백성들이 천황을 따라 다물임나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민 집단의 수가 3만 명을 넘었고, 그 중에는 밝지 신군을 이탈한 탈영 낭인무사들이 무장한 상태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담덕태왕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실라를 구하기 위해 가우리의 보기군(步騎軍) 5만의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전투 상황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담덕의 군사적 대응이 어떻게 한반도의 정세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담덕태왕의 전략이 어떻게 밝지와 실라의 운명을 좌우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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