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레이튼 포크: 조선과 미국의 외교를 잇는 다리

19세기 후반,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 미 해군 중위는 조선에서의 외교 활동을 통해 두 나라 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크는 1883년 9월, 조선의 첫 방미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 일행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를 새롭게 열었다. 그의 외교적 임무는 단순한 통역을 넘어,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884년 5월, 포크는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에 도착했다. 그는 1885년 1월, 전임 푸트(Foote) 초대공사가 사임하자 20개월간 대리공사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 포크는 고종의 비공식 외교 자문역을 맡아 조선 정부의 반청(反淸) 자주외교를 지원하며, 조선의 외교적 독립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포크는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지방을 여행하며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가 입수한 대동여지도는 현재 위스콘신주립대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또한, 포크가 사용한 한글자모와 모스부호 대조표는 조선의 외교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대조표는 한글자모와 모스부호 외에 영어 알파벳 및 일본 가타가나를 대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언어적 교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포크는 조선의 정세를 정기적으로 미국 정부와 해군성에 보고했으며, CIA는 그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수집(Humint)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주요 지방을 시찰하며 군사 요새와 지역 민심을 파악해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은 조선 정부가 외국과 맺기 위해 마련한 각종 조약의 초안까지 입수할 정도로 뛰어났다.

포크는 또한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주민들의 공격으로 침몰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셔먼호는 조선이 외국인들의 입국을 불허하고 있었던 만큼 올 이유가 없었다"며 조선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그가 단순한 외교관이 아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는 진정한 외교관임을 보여준다.

1887년, 포크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부인과 결혼하고, 이후 수출입 회사를 경영하며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893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외교적 활동과 정보 수집 능력은 조선과 미국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기록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남아 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의 이야기는 단순한 외교관의 일대기를 넘어, 조선의 역사와 국제 관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의 활동은 조선이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포크는 진정한 외교관의 자세를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