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는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에도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특히 장애인을 위한 사업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며, 1985년 2월 부산에 한울장애인자활센터를 열었습니다. 이 센터는 당시 장애인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던 부산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한울장애인자활센터에서는 매년 교육생을 모집하여 무료로 1년간 직업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컴퓨터 교육이 주목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은 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최성묵은 이 교육을 통해 장애 청년들이 공기업, 도서관, 회사 등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제1기 교육 때는 구형 XT형 컴퓨터 한 대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컴퓨터와 교육생 수가 늘어나고, 1988년에는 올림픽 때 사용했던 IBM 컴퓨터를 기증받기도 했습니다. 이강현은 미국에서 모금을 통해 신형 286 컴퓨터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울장애인자활센터는 장애인 직업교육의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장애인 교육사업을 넘어, 최성묵은 장애어린이 조기교육으로 사업을 확대했습니다. 부산지역 뇌성마비복지회 사무국장 윤원수의 제안에 따라 중부교회에서 장애어린이 조기교육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최성묵은 독지를 모으기 시작하고, 재일동포 독지가의 도움으로 중부교회에 부설 한울장애어린이집을 설립했습니다. 이강현 또한 미국에서 다니던 교회와 로드아일랜드 한인회에 부탁하여 성금을 모았습니다. 한울장애어린이집은 1990년에 전국 최초의 장애아 전담 어린이집으로 개원하였고, 조성항 장로가 원장을 맡아 3명의 교사와 10여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최성묵은 부산시향 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부산시 문화회관 측의 요청을 듣고, 문화방송의 유판수 국장 등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 부산의 문화를 가꾸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1990년 3월 부산시민 2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부산시립교향악단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이는 국내에서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대근, 유판수, 이강현 등이 중심이 된 한국자원봉사연합회가 1991년 2월 개설되었으며, 이 사업에도 최성묵의 지지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회사업들은 한국 혹은 부산 최초의 사업으로, 최성묵이 소외된 사람들과 어려운 이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바탕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최성묵의 헌신적인 사회사업은 단순히 장애인을 돕는 것을 넘어, 부산 지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현재에도 그 정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성묵의 사회사업은 한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가 남긴 발자취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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