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와 6월 항쟁: 부산 시민들의 불굴의 투쟁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 군은 부산 출신으로, 부마항쟁의 주역이었으나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항쟁을 지켜보며 아픔을 겪었던 부산 시민들에게 이 사건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6월항쟁의 과정에서 부산 시민들은 당당하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2.7 추모대회에서 시민들은 10월 부마항쟁의 거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고, 3.3, 6.10을 거치면서 ‘국민의 힘으로 이 정권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후 매일매일의 치열한 항쟁 과정은 특히 6월 10일부터 19일까지의 10일 동안 밤낮없이 시내 중심가를 누비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열정으로 나타났습니다. 가톨릭센터 농성의 치열함과 6월 18일 저녁 서면에서 조방 앞까지 가득 메운 30만 시민들이 외쳤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이 그 증거입니다. 이 기간 동안 부산 시민들이 보여준 민주화에 대한 헌신적인 열정은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부산의 자긍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항쟁의 중심에는 최성묵 목사가 있었습니다. 문재인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송기인 신부님의 도미 중에 맞이한 1987년의 6월항쟁 기간 동안 그는 부민협 회장으로서 부산 국본의 상임공동대표가 되어 무거운 짐을 홀로 도맡았고, 중부교회를 항쟁의 본부로 제공하며 젊은이들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시위대의 선두에 섰습니다." 부산 시민들은 유신체제를 끝낸 부마민주항쟁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6월항쟁에서도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부산 국본의 상임공동대표였던 최성묵과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노무현 변호사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고, 매일 일반 시민들과 함께 최루탄에 쫓기며 가두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경찰과 맞섰습니다. "목사, 신부, 변호사 같은 점잔 빼는 이들이 매일 시민들과 뒤섞여 최루탄에 쫓겨 다니며 시위에 참가하고, 나아가 선두에 서서 시위를 이끈 것은 아마도 6월항쟁 때의 부산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고 문재인은 강조했습니다.

최성묵과 노무현의 협력은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을 위한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지식인들의 사회참여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민주화를 좌우할 결정적 국면이라는 역사적 의식을 가지고 행동했으며, 사회적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최전선에서 싸웠습니다. 문재인은 그들이 특히 존경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성묵의 헌신과 용기는 부산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민주화의 길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부산은 6월항쟁에서 중요한 전투의 장이 되었습니다. 최성묵과 부산 시민들의 불굴의 투쟁은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민주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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