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님의 민주화 투쟁과 사회적 책임

1985, 최성묵 목사님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해 취업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한울장애자자활센터(이하 '한울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이 교육센터는 당시로서는 일반 사람들에게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에게 '전산 교육''인간 교육'을 가르쳤으며, 박영미 총무, 최혜림 총무 등 역대 지도자들과 당시 교회 집사였던 이숙희 선생, 에덴주택 김찬한 사장 등 주변 사람들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한울센터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문적인 정보 지식의 함양과 소외된 사람 중심의 인간관계 관리를 바탕으로 한 "21세기 글로벌 지식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많은 장애인들이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부산-YMCA의 유정애 선생 등 역대 졸업생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큰 몫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많은 교인들에게 자상함을 보여주셨습니다. 한울센터의 학생들뿐 아니라 일반 교인들의 결혼식에서도 주례를 맡으셨고, 교인들의 자녀에게 이름도 지어주시고, 사업을 시작하는 교인들에게는 회사 이름도 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금전 문제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고, 집 한 채도 없었습니다. 당시 부산 사하구 괴정에서 우창웅 교수님의 친척 땅에서 박상도 형과 함께 벽산건설에 의뢰하여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목회 은퇴 뒤를 생각하여, 부산역 앞 사무실에서 조태원 후배와 약속을 잡은 뒤 상도 형과 태원 씨를 찾아가, "상도 형, 선생님을 위해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우창웅 교수님께서 그렇게 민주화를 위해 고생하는 사람에게 안 해 주고 누구를 해 주겠느냐!”며 연체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괴정4동의 "벽산아파트"는 선생님 몰래 사모님과 협의하여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평생 처음으로 마련한 자기 소유의 집에 살아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올바른 예수의 시대적 정신과 선교 일치운동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론과 말씀보다는 몸으로 실천하는 행동적인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행동과 설교에는 한국 교회가 세계적 흐름과 달리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세상에서 버림받고 민주와 정의를 말하려는 민중들을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를 향해 "뱀같이 사악한 무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처럼, 교회의 허상과 오만함을 개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타 종교와 협력하지 못하는 "복음주의""근본주의"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셨으며, 종교의 다원주의보다는 이웃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서구의 종교적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초교파적인 민주 역량의 연대와 단결을 위해 천주교, 원불교, 불교 등과 협력하셨습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지나 노태우 정권 시절, 동구와의 수교에 따른 북방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독일 브란트 통일정책을 언급하며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에 대해 정부에 보다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접근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높은 식견으로 미래를 전망하며, 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남북의 통일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남북의 통일문제"는 그에게 단순한 정치적 과제가 아니라,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필수적인 사안이었습니다. 그는 "동족의 피를 흘리는 아픈 사건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남북 관계 기본 원칙과 통일관은 당시 매우 진보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통일 문제에 대해 공부하던 박관용 의원조차 선생님의 제안이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이라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남북 대결 관계를 평화적인 통일로 정착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두시고, "민족 해방을 위해서는 독일의 브란트 정권이 했던 것처럼 TV 시청, 자유 왕래, 서신 교환 등 양측이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통일 문제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민간도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의 통일에 대한 비전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목표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신념과 실천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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