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취임하면서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동유럽의 "자유화 바람"이 불어 닥치는 러시아를 보시면서 때때로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 경제적으로는 계획․통제방식의 경제정책이 골자인 "이론공산주의"에서 새로운 세계문명의 인식과 사회주의의 일대변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창조력"과 "생산성"을 가미하려는 그에게 많은 흥미와 경의를 표시했다.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길,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판사회이론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설득력 부족으로 당분간 사회주의 확산은 어렵겠지만, 외국 사회주의국가는 어떤 형태로던지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나라도 특정계층 또는 어떤 형태로 그 역할에 있어 주목받는 시절이 올 것이다"라고 전망하셨다.
선생께서는 안병무선생의 "조직신학"과 그 외의 남미 "해방신학"에도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단순히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적인 사상보다는, 부패된 독재정권과 이를 추종하는 타락된 인간들의 모습에서 오는 대응전략이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일방적인 경제제일주의 성장전략과 글로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대안과 남북문제를 고려한 묘안을 찾기를 위한 것으로 보였다.
1980년대는 박정희대통령이 이룩한 공업화 성공전략에 따른 수혜로 인해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대다수 국민들이 풍족함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국민들은 소득이 증가되면서, 복지적인 측면에서는 향상된 반면,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의 잔재와 민주화과정에서 최고 권력주변의 뇌물사건과 고급관리의 부정부패사건 등 민주국가로서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정세는 세계의 글로벌 경제적 통합기류를 함께, 세계기류는 새로운 도전과 국가사회 변화중심에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 특히, 부산과 경남을 정치적 근거지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시던 김영삼총재가 군부세력으로 통칭되던 노태우대표와 김종필총재와 함께 3당 통합을 이루면서 여당 대통령후보가 되면서 기존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혼란과 대응국면이 전게되었다. 부산의 경우, 재야 민주세력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여론과 지지가 김대중선생이 창당한 평민당으로 몰아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지지도이면에는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역랑이 함께 있었다. 당신께서는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주주사회를 위하여 민주세력들이 중심되어 부산시장을 선출하여야 한다면서, 시장에 출마하시는 것을 검토하셨다. 나는 당시 이러한 선생행동에 대한 당위성까지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생각해 보면, 당신의 행동은 민중중심의 풀뿌리 민주화실천을 위한 지방자치정부의 운영과 우리나라의 올바른 지방자치정부의 실현과 공명선거와 민주화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라고 봐야 했었다.
선생께서는 간혹 당신을 이해 못하는 몇 명의 교인들 때문에 성이 나시면, 교회 집사이며, 청년집사의 리더역할을 했던 내가 선생님의 말씀에 대꾸를 하는 날에는 만만하게 생각하시던 나에게 주일예배를 마치시고 1층 예배당 점심식사 중이라도 공개적으로 "야! 이 부로주아 같은 놈아!"라고 호된 꾸중을 하셨다. 교회집사와 장로들이 놀라고 때로는 주변 신도들이 아무 말 못하고 나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만 눈치를 살피곤 했다. 당시에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이태성집사는 목사님과 나의 관계를 잘 모르는지 "형님! 왜 그렇게 참아요! 한 말씀 하시지요?"라기에 웃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중부교회는 "부산민주화성지"뿐만 아니라, 신앙심 깊은 교인들의 교회였다. 선생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지켜주신 것은 장로님과 권사님들을 포함한 교인 모두의 힘이었다. 특히 선생께서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이 평안도로서 나이가 비교적 많은 나이에 한국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기장(基督敎長老敎)운동에 신념을 받치고 정열이 넘쳤던 박순금장노님과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속했던 조성항장노님 등 전체 교인중심으로 목사님을 믿고 섬겼던 깊은 신앙심과 시대를 앞서 가는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박순금장노님은 평양이 고향이셨기에 통일문제와 인권문제에 대단한 정력을 바치셨다. 특히, 많은 학식을 가지신 못하였지만 젊은 여신도회의 발전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강조하시면서 장기와 시신의 기증운동에도 앞장을 서시는 훌륭한 여성지도자였다.(그 후, 박장노님은 돌아가시게 되면서 시신을 당신의 유언대로 모 대학병원에 기증하게 되었으며, 추도예배는 여동생이 목회자로 계시는 서울잠실에 있는 교회에서 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권사님들과 연로한 교인들의 행동은 젊고 감성적인 나의 가슴을 뭉클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전 서울-YMCA연맹 강문규사무총장의 어머니이신 고 최현순 원로권사님은 나를 반하게 하신 분 중의 한분이셨다. 당신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시기 몇 일전 주일교회에 나오시면서, 골목계단을 힘들게 오르시면서 "성전은 나의 생을 바치는 힘이다"이라고 외치는 듯이, 보였다. 당신께서는 남의 도움을 뿌리치고 혼자 힘으로 계단을 오르시던 그 진지한 모습에서 평소의 진주고녀를 나온 학식과 유려하게 쓰시던 필체보다는 또 다른 면에서 그분의 높은 신앙심과 인생의 진지함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훌륭한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러한 아들이 때어 났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러한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는 그런 분들이 몇 분 더 계셨음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중부교회는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운 훌륭한 교인들 덕분에 60여명의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칠 수가 있었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유지할 수 있었다.
답변
최성묵 목사님과 한울센터: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
1980년대 후반,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취임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동유럽에서 자유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상황을 보며 최성묵 목사님은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공산당 일당독재와 계획 경제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세계 문명과 사회주의의 변신을 요구하는 "인간의 창조력"과 "생산성"에 주목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판 사회 이론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설득력이 부족해 당분간 사회주의 확산은 어렵겠지만, 외국 사회주의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도 특정 계층이나 형태로 주목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셨습니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사회주의나 마르크스 사상에 그치지 않고, 부패한 독재 정권과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98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공업화 성공 전략 덕분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풍요를 누리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의 잔재와 부정부패가 여전했습니다. 이 시기에 최성묵 목사님은 부산과 경남에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던 김영삼 총재와 함께 활동하셨고, 부산 지역의 민주화 세력은 김대중 선생이 창당한 평민당으로 몰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민주 세력이 부산시장을 선출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시장 출마를 검토하셨습니다. 당시 제게는 그의 행동이 당위성까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행동은 민중 중심의 풀뿌리 민주화 실천을 위한 지방자치 정부 운영과 올바른 민주화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때때로 몇몇 교인들로 인해 화가 나셨고, 저에게도 공개적으로 "야! 이 부로주아 같은 놈아!"라고 꾸중하시곤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제 태도를 살피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 후배인 이태성 집사는 "형님! 왜 그렇게 참아요!"라고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부교회는 단순히 "부산 민주화 성지"일 뿐만 아니라, 신앙심 깊은 교인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지켜준 것은 장로님과 권사님들을 포함한 교인들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박순금 장로님은 통일 문제와 인권 문제에 많은 정력을 기울이셨고, 젊은 여신도회의 발전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시며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교인들 덕분에 중부교회는 60여 명의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한울장애자자활센터」를 설립하여, 그들에게 전산 교육과 인간 교육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으며, 장애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중받고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큰 업적이었습니다.
목사님은 "한울센터"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문적인 정보 지식의 함양과 소외된 사람 중심의 관계 관리를 통해 21세기 글로벌 지식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비전 덕분에 많은 장애인들이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여정을 넘어, 한국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희망과 변화를 찾는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이며, 그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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