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유신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법과 정의가 무너지고 많은 학생과 청년들이 원치 않는 감옥으로 가는 사건이 증가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시대의 양심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적 현실과 사명감에 직면하고 계셨습니다. 부산 YMCA 총무로서의 역할은 그의 사명감에 비해 주변 환경이 버겁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창목재의 정회장께서 회장으로 계실 때, 예산에 비해 주문 사항이 많아 이사회와 잦은 충돌이 있었고, 회장과 총무 역할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느 날, 최성묵 목사님은 특유의 웃음으로 “야! 총무가 뭐 ‘가방모찌’나 하는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시며 푸념을 담아내셨습니다.
선생님은 간혹 친절한 벗이었던 교육대학의 우창웅 교수님과 바둑을 두며 소중한 시간을 나누셨습니다. 바둑을 두는 속도가 빨라 보는 이에게는 재미가 덜했지만, 두 분은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으셨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을 향해 바른 말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밖에 없으며, 목회자의 길로 가겠다”고 결단하셨습니다. 그렇게 부산 YMCA 총무직을 사임하시고, 심응섭 목사님과의 승계 과정에서 중부교회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1977년 3월, 선생님이 중부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저는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반 예식장임에도 기꺼이 오셔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 정신보다 선생님을 좋아해서 전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아내와 의논하였고, 그녀도 쾌히 동의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목회자로서 세례를 주실 때, 저는 조인두 청년 등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종교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선생님을 만나면서 해결되었고, 제 인생은 더욱 안정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주도와 울산 등지로 발령받아 근무하면서도 한시도 선생님을 마음속에서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울산 소장 시절, 주일이면 특별한 약속이 없을 시, 사랑하는 아내와 태우, 태호, 치양 세 자녀를 태우고 2시간이 넘는 편도 길을 달려 부산 중구 보수동의 중부교회로 가곤 했습니다.
70년대 어느 날, 교회에서 선생님과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4대 복음서 이외에 Q복음서라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한국은 독재정권의 여러 가지 행태로 인해 남미 중심의 해방신학과 한국신학대학의 민중신학이 신학계의 관심을 독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선생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는 오늘의 암울한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어두운 상황을 연결지어 말씀하셨습니다.
1979년 말, 저는 삼양식품 제주영업소에서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해는 유신헌법과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제명처분 등으로 정치적 긴장이 높아져 부마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친구들의 전언에 따르면, 선생님은 길거리의 맨 앞에서 워싱턴 행진을 이끌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행동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최성묵 목사님은 민주화를 열망했던 박상도, 김형기, 김광일, 임기윤 등 부산 지역의 민주 인사들과 함께 부산 안전기획부 안가에 구인되셨습니다. 옆 방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선생님에게는 폭행 등 물리적 행동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 반복되는 심문 속에서 선생님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바지가랑이가 땀과 오줌으로 흘러내린 줄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고초의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아침, 담당 조사관들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10.26 사태'가 선생님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포항 총살형 이후 두 번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목숨을 연장받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이 있은 후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박상도 형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같은 공간에 시대적 사건 외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함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상도 형은 그 사람에게 "왜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돈의 출처를 말하라는 것은 나의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1980년대 선생님의 일상생활은 전국에 산재한 청년들과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 그리고 독자적 행동과 교회 설교를 통해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선생님의 민주화 투쟁은 더욱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관계 기관은 직원들은 물론 주변 인사들까지 동원하여 회유와 징벌을 강화했지만,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대의와 진실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선생님의 친화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과거 서울에서 활동할 때 교류했던 인사들, 부산대학의 김동수 박사와 부산 제일교회의 임기윤 목사, 광주 홍남순 변호사 등과의 인연을 이어가셨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광주민주화 7주년이 다가오면서 서울과 광주를 중심으로 반정부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군의 죽음으로 인해 '6월 항쟁'이 가속화되었고, 선생님은 언제나 젊은 기상으로 거리의 민중을 이끌고 계셨습니다.
부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주도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됩니다. 그때의 모습은 선생님의 혁명가적인 기질과 예술가적인 모습, 정의의 사도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최성묵 목사님은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의 삶과 정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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