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전쟁의 틈새, 한국 조선업에 열린 ‘27조’ 기회

미중 간의 기술·산업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은 이 거대한 충돌 속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찾아내고 있다. 최근 미국이 자국 항만의 보안을 이유로 중국산 크레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 항만시장 진출의 기회를 맞이했다. 단순한 공급 대체를 넘어, ‘조선소 자동화라는 고부가가치 기술까지 함께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현재 미국 항만에 설치된 크레인의 약 80%는 중국 국영기업 ZPMC의 제품이다. 하지만 해당 장비들이 사이버 보안과 데이터 유출 문제의 잠재적 위협으로 지목되며, 미국 정부는 이를 대체할 공급망 구축을 추진해왔다. 바이든 행정부는 약 200억 달러, 한화로 약 27조 원 규모의 교체 예산을 책정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중국산 부품에 100% 관세를 예고하며 규제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게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가 직접 방한해 HD현대, 한화오션과 만남을 가진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단순히 선박 수주를 논의하는 자리가 아닌, 미국 항만 크레인 시장에서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로 한국 기업을 공식 검토하겠다는 시그널이다.

 

HD현대는 이미 크레인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가능한 전 공정 자체 수행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화오션은 필리조선소를 중심으로 미국 내 스마트 조선 시스템 확산 전략을 준비 중이다. 특히 미국이 눈독 들이고 있는 부분은 한국의 자동화 기술력이다. 조선 인프라가 쇠퇴하고 기술 인력이 부족한 미국으로선, 한국의 자동화 조선 기술은 그 자체로도 전략 자산이 되는 셈이다.

 

이번 논의는 단순한 산업 협력을 넘어 통상 협상의 새로운 지렛대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한미 간 조선업 협력이 본격화될 경우, 향후 관세나 무역장벽 협상에서 한국이 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자국 내 조선 역량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의 기술과 시스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이 같은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

 

한국 정부 역시 이를 전략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항만 크레인 협력도 미국 측의 관심 분야로 충분히 얘기될 수 있다고 밝혔고, HD현대 외에도 HJ중공업이 부산항의 크레인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 중이다.

 

물론 중국의 낮은 가격이라는 현실적인 변수는 존재한다. 하지만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구조적 변화 속에서는 단순한 가격 경쟁력보다, 안보와 기술 신뢰성에 기반한 파트너십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 기업들은 이 틈을 전략적으로 공략해 새로운 수출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미중의 첨예한 대립은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한국이 틈새를 찾아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면 오히려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 27조 원 규모의 미국 항만 크레인 시장은 단순한 장비 수출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한국 조선 기술이 단순 생산 능력을 넘어 산업 구조 개혁이라는 새로운 역할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중 패권전쟁의 한가운데서, 한국은 지금처럼 틈새를 찾아 기민하게 움직일 때 국제 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다.

경쟁이 아닌 보완, 갈등이 아닌 협력의 방식으로 한국은 중견국으로서의 실질적 존재감을 증명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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