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정치적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0월 16일 오전 10시, 수천 명의 부산대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경부터 도심의 광복동, 창선동, 대청동, 중앙동 등지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대되었습니다. 저녁 6시가 지나면서는 퇴근하는 회사원과 노동자들, 심지어 고교생들까지 합류하여 민중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10월 17일에는 동아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중구, 서구, 동구 지역에서 21개 파출소와 경찰차량, 경남도청, KBS, MBC, 부산일보 등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유신정권은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했습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지만, 시민들은 다시 남포동에 집결하여 시청을 향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의 진압으로 사흘에 걸친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부산에 계엄령이 내려진 다음 날인 10월 18일, 경남대학생들은 시국 토론을 하던 중 학교측의 휴교조치에 반발해 교내 시위를 벌였습니다. 오후 5시경, 그들은 3·15의거탑 앞에 모여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서 마산의 중심가에서도 퇴근하는 시민들이 합류해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고, “박정희 물러가라”, “언론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19일 오후, 부산에 파견된 공수부대가 마산으로 급파되면서도 민중들의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유신정권은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습니다.
부마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 오후 4시경, 최성묵 목사는 서재에서 시위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이 시위를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 다음 날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최성묵은 체포되었습니다.
10월 20일 새벽, 서울 KNCC 인권위원회의 손학규 간사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최성묵은 그와 함께 부산의 실상을 서울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부교회 앞의 대도다방으로 이동하던 중, 이들은 형사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합동수사본부에서 가혹한 수사를 받았습니다.
합수부는 부마항쟁의 배후 조직도를 그리며, 최성묵을 총책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른 허위 주장이었습니다. 최성묵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무슨 무슨 책, 누구는 무슨 책하며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서 말”하는 과정이 상투적 수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체포되기 전, 대구의 기독교인 임종호가 최성묵에게 전화를 걸어 부마항쟁에 대해 은어로 물었고, 이 대화가 도청되어 간첩 접선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최성묵은 “사과가 많이 떨어지죠?”라는 질문에 “태풍이 많이 불긴 했는데 사과가 몇 개 떨어진지 모른다”고 답했고, 이로 인해 임종호도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부마항쟁은 단순히 학생들의 저항이 아닌, 시민 전체의 저항으로 발전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항쟁은 민주화의 열망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성묵과 많은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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