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2월 13일, 최성묵은 중부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77년 4월 3일 정식으로 목사로서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부산 지역의 재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의 기독교 세력도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이를 통해 부산과 서울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 4월, 부산지역 도시산업선교회가 조직되며 민주화운동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최성묵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시민들에게 민주화운동의 사상과 동향을 알렸습니다. 김정한, 황석영, 백기완 등 유명 강사들이 참여하여 강연회를 통해 부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청년회는 철거 이주민들의 실상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습니다.
중부교회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많은 민주인사들이 이곳을 통해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박상도, 김형기, 차선각 등 주요 인물들이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민주화운동에 기여했습니다. 이와 함께 양서협동조합운동(양협운동)이 시작되어,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소비자 협동조합이 민주화운동의 대중조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8년에는 민주화운동이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었습니다. 중부교회 청년회원들은 부산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며 반민주적 탄압 중지와 긴급조치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정치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최성묵은 이 사건의 경과보고로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또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유인물을 살포하다가 체포되고, 부산대학생들이 반정부 구호를 작성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중부교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최성묵은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며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최성묵은 다방에서 젊은이들과 담배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으니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접근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교회는 더욱 활기찬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최성묵의 목사직 취임 이후 그의 아내 김순이는 처음으로 월급을 받게 되었고, 사택도 제공되어 안정된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성묵의 대외 활동이 많아 교회 내 업무는 김순이가 맡게 되었고, 그녀는 기꺼이 이를 감당했습니다.
1978년 4월 17일, 중부교회 청년회원들은 부산대에 유인물을 배포하며 민주화 요구를 외쳤고, 이 사건으로 인해 최성묵은 다시 한 번 권력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중부교회는 민주화운동의 격렬한 시기에 더욱 권력의 눈초리를 받으며, 최성묵을 감시하는 경찰은 그의 곁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최성묵의 중부교회 담임목사로서의 여정은 단순한 신앙의 길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운 역사적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젊은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중부교회를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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