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와 ‘생명의 전화’ : 부산 민주화의 길을 걷다

1977년부터 최성묵은 부산에서 ‘생명의 전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전화 상담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사회운동으로, 1979년에 부산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성묵이 준비위원장으로 나서려 하자 중앙정보부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는 즉각 물러나고 부산의대의 김동수 박사에게 부탁하여 이 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1979년은 한국 정치가 더욱 긴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시기였습니다. 1978년 12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야당 신민당의 총 득표율이 여당을 1.1% 앞서며 유신체제의 민심 이탈을 명확히 드러냈습니다.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면서 유신체제의 철폐와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습니다.

이 무렵, 재야 인사들인 함석헌과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을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문을 배포한 혐의로 중부교회의 조태원과 노경규가 연행되었고, 최성묵 목사 또한 조사받게 되었습니다. 1979년 5월 7일에는 중부교회 교인 최준영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6월에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카터의 인권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 정책은 한미관계에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방문은 겉으로는 봉합된 듯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7월 23일, 김영삼 총재는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헌법특위를 제안하며 민주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8월에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며 사업주의 폐업에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여성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자 신민당은 이에 항의하는 농성 투쟁에 나섰습니다. 또한, 신민당 내에서의 내분이 심화되며 박정권의 정치 공작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영삼 총재는 1979년 9월 15일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기자회견에서 유신헌법과 미국의 대한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유신정권은 그의 발언이 국위를 손상시키고 한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반발하며, 10월 4일 국회에서 김영삼을 제명 처분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 나라에는 민주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민주투쟁의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최성묵과 중부교회의 활동은 단순한 신앙의 영역을 넘어,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생명의 전화’와 같은 사회 운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민주화의 길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후에 이어질 민주화의 물결을 준비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억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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