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양: 희생과 구원의 메시지

1990년 10월 21일, 고 최성묵 목사님은 "속죄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본문은 판관기 11장 3440절, 이사야 53장 7절, 마태복음 27장 2731절이었습니다. 이날은 문익환 목사님께서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시고,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1년 6개월 전, 방북 이후 나라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지금의 상황은 한없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비난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제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른 방북 인사들도 곧 석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 없이 비굴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제부터라도 자각하고, 삶의 주체로서 행동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판관기와 여호수아를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12명의 판관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위급할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 중 ‘입다’는 창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로, 비적대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잡신을 믿으며 살아갔습니다. 압몬군이 침략해 오자 화친을 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입다는 압몬군을 이기면 처음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압몬군을 단번에 쳐부숴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입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외동딸이 가장 먼저 그를 반겼습니다. 입다는 두 달 동안 그녀를 산에 떠나 보내고 돌아온 후, 딸을 번제로 바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신앙의 저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 신앙의 전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속죄양으로 염소 두 마리 중 하나는 죄를 대신하고, 다른 하나는 광야로 보내져 멀리 떨어뜨려집니다. 이러한 제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입다의 승리로 인한 기쁨 속에서 그의 딸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서자의 자식으로 비적대의 대장이 되어 돌아온 외동딸이 꼭 죽어야 했는가? 아버지가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대가로 이 정도의 희생은 너무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쳐야 할 이유를 묻고, 아벨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고민했던 것처럼, “입다의 외동딸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속량을 위한 의로운 자들의 희생과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복수심과 국가 권력, 그리고 못된 마음들이 결국엔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오늘도 갇혀 있는 민주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간악한 지도자에게 심판을 요구하며, 정의와 자유를 위해 피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버팀목 역할을 하며, 타락하고 더러운 사회를 구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 그리고 복된 사람들이 그들 뒤에 있었습니다. 아멘.

이 설교는 고대사와 관련된 여러 문헌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기》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구원의 과정을 탐구하며, 일본의 고대 문헌인 《고사기》에서도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희생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고대 한국 사회에서도 인간의 고통과 구원이 중요한 주제였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고대 문헌들은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희생의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결국, 우리는 속죄양의 이야기를 통해 희생과 구원의 메시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희생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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