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만남 자체가 영감이다. 열정적인 K 젊은 예술가는 물론 수많은 원로 예술가, 음악인, 연극인과의 교류는 단지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를 더한다. 이렇듯 경계를 허문 융합 예술은 분명히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대한민국 아름다운 흐름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각 분야의 고유성과 깊이를 잃지 않는 탐구가 필요하다. 자유로운 표현이 시대의 공기를 대변하더라도, 비판과 사유 없는 유희는 쉽게 공허해진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사법 정의에 분노해 파리 공연을 거부했다. 그리그의 결정은 예술가가 정치적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상징이 되었다. 이는 예술이 단지 감성에 머물지 않고, 윤리적 판단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대를 넘어 예술이 어떻게 시민 의식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엑시트 가능한 사회’가 필요하다. 불평등이 고착되고, 제도적 탈출구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갈등만이 남는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기회의 세습과 박탈이 극단적으로 대비될 때, 사회의 건강성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다. 그 해결은 예술의 상상력만으로는 부족하며, 정책과 제도의 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
한편, 국가는 점점 ‘보모’가 되고 있다. 시장은 정부의 보조금에 익숙해지고, 스스로 생존하려는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 복지와 지원은 필수지만, 그것이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문제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란 의존이 아닌 상호 책임과 주체적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분별력을 요구받고 있다. 나치즘은 거대한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총통이 되기 위한 선동과 조작, 그 배후에는 진실을 가리고 감정을 선동하는 언어의 폭력이 존재했다. 현대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원자폭탄’보다 무서운 ‘사이비 폭탄’을 던진다. 허위와 조작, 증오와 음모가 사실을 지우고 역사까지 세탁하려 들 때, 민주주의는 근간부터 흔들린다.
따라서 시민은 더욱 냉정해야 한다. 유권자는 선거 때마다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소비한다.
야구 유니폼을 입은 선수처럼, 정당의 색깔만 보고 선택한다. 그러나 정치인은 엔터테이너가 아니다. 그들의 언어, 정책, 과거를 검토해야 한다. 감성보다 이성이 우선돼야 하며, 우리는 선거 운동복 너머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며, 정치는 그 현실을 만들어가는 도구다.
이 둘 사이에서 시민은 분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이 공존할 때, 우리는 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단상, 건강, 환경, 문화, 상식,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교와 산업이 탈정치화된 한국, 정직한 비전만이 국가를 살린다. (4) | 2025.05.30 |
---|---|
종교, 대학, 정치 — 역사로 본 시민의 각성과 분별의 책임 (4) | 2025.05.30 |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선택, 김연아를 경기도 홍보대사로 위촉한 이유는? (5) | 2025.05.25 |
늙는 것을 인정하면서, 일로 즐기는 법을 실험할 때입니다 (0) | 2025.05.23 |
"청렴한 김문수, 인간적으로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0) | 202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