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실(漢王室) 10대 원제(元帝, 기원전 4933년)의 황후는 왕씨(王氏) 가문 출신으로, 이후 11대 성제(成帝, 기원전 337년)가 즉위하자 왕씨 가문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왕망(王莽, 기원전 45~서기 23년)은 38세에 대사마(大司馬)로 임명되어 한 왕실을 장악하게 되며, 그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은 대사마대장영상서사(大司馬大將領尙書事)로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왕망은 금일제(金日帝)의 증손자인 금당(金當)의 외가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금당은 투후벼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습니다. 그러나 서기 5년,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2살짜리 영(靈)을 재위에 올려놓고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후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웁니다.
금씨 계열은 왕망과 힘을 합쳐 전권을 장악하며,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외가 금씨 계열은 정치 실세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왕망 정권은 교만하여 풍족(匈奴족)을 얕보고 신흉노선우장(新匈奴禪于章)이라는 새로운 도장을 보내 선우(禪于)를 모욕하게 됩니다. 이에 풍족의 선우는 대노하여 운중(雲中)을 초토화시키고 왕망군을 대파합니다.
왕망은 힘의 대결에서 밀리자 교활하게 맥국(貊國, 고구려)에게 흉노를 제압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고구려는 오히려 신제국의 동북변을 침범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부르며 분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인근 국가들의 지속적인 침략과 위협 속에서 왕망 정권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결국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劉氏)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불과 15년 만에 망하게 됩니다.
신제국의 주축 세력인 금씨 계열은 필사의 탈출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한동안 산동반도와 밝해(渤海) 연안에서 항거세력으로 머물던 금씨 집단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합니다. 일부는 평양지방(龍城國古地)으로 내려오고, 또 다른 집단은 산동반도로부터 황해를 건너 큰무라(建牟羅) 지역으로 상륙한 후 계림(鷄林)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금일제의 5대 손인 금성(金星, 星漢王)과 그의 금씨 집단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전설의 주인공 금알(金閼)치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금알치 세력은 계림으로 상륙한 지 9년 만에 석탈해 정권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 이사금에게 탈취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한반도(韓半島)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과 봉니(封泥)들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신제국의 몰락으로 대륙 밖으로 이동해온 금씨 집단과 그 추종세력의 흔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한나라의 흥망과 그 후의 여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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