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2년 개천(開天) 24년, 용성국의 마지막 칸(汗)인 함달파칸(含達婆汗)이 세상을 떠나자, 8품 성골회의는 그의 아들 약관(約冠) 17세를 용성국의 새로운 주인으로 뽑았다. 그가 바로 석탈해칸(昔脫解汗)이다. 석탈해가 칸위에 오른 지 몇 달도 안 되어 용성국은 낙랑(樂浪)의 침공을 받게 되었고, 결국 20여 척의 무역선에 백성을 분승시킨 후 두 번째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석탈해칸 일행은 황해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을 피하고 남해를 돌아 구야(狗耶) 지역으로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북쪽에서 내려온 뇌실청예(惱室靑裔, 金首露王)가 현주민들을 정복하고 금관가라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로 인해 석탈해군과 김수로군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상인 집단으로 소수의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던 석탈해군은 9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린 김수로군에게 패배하고, 세 번째의 망명길에 올라 멀리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현재의 감포)에 상륙하게 된다. 이 사건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으며, "탈해칸과 김수로왕은 서로 구야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갖은 지혜를 다 동원하여 싸웠는데, 결국 김수로왕이 승리하여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패배한 석탈해칸은 알천(閼川)에 이서국(伊西國)을 세우고, 그 서울을 큰무라(建牟羅)라고 불렀다. '무라'는 용성국의 언어로 그들 집단의 마을을 의미하며, 석탈해칸의 무라 집단은 후일 신라 김씨들에게 쫓겨 일본 섬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들이 살던 여러 곳에 "무라"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며, 일본에서는 마을(村)을 '무라(むら)'라고 부른다.
이후, 석탈해칸의 무라 집단은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새라불족과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새라불족은 서울을 떠나 호서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밝지에게 도전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동남쪽으로 쫓기게 된다. 그들은 경주 지방까지 도달하지만, 이미 큰무라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고 석탈해라는 걸출한 인물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새라불족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전력을 다하여 무라 집단에게 도전하게 된다. 이리하여 알천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으나, 그 결과는 새라불족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왕은 전사하고 나머지 백성들은 무라측에 귀순하게 된다. 밝씨 왕조의 새라불은 이렇게 하여 122년 만에 한반도를 헤매다가 끝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조용히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이 사건은 고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내며, 석탈해칸과 김수로왕의 대결은 구야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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