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기원: 밝혁거세와 그의 전설

신라의 기원은 고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시조인 밝혁거세(朴赫居世)의 전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역사적으로 남 몽고, 즉 중국 황하의 북편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족으로, 그들의 왕을 '수라(흉노말로 上, 王)'라 부르며, 수라가 있는 벌[原, 불/부리]을 '소부리(所夫里)'라 하였습니다. 이들이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도 남겨놓은 지명 소부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로 변하여 오늘날의 지명 서울로 남게 되었습니다.


개천(開天) 3897년, 즉 기원전 1년, 한반도는 마한열국들의 기득권을 탈취하려는 북방 세력 간의 각축전으로 격동의 한 세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한수(漢水) 북방에 조용히 머물고 있던 수수께끼 같은 집단이 바로 밝혁거세의 신라 세력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서기전 403년부터 서기전 221년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대제국 주(周)가 몰락하면서 힘의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중국의 주나라 또한 힘을 잃고 천하가 새로운 군소 세력들의 패권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황하의 상류, 즉 인산산맥(陰山山脈)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현지 말로 '실라(新羅)'라 부르며, 이 강변의 넓은 초원지대에서 동호족(東胡族)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기전 87년, 오환족은 초원을 탈환하기 위해 큰 싸움을 벌였으나 훈족의 막강한 힘에 패하고, 이때 흩어진 오환족 중 우거수(右渠師) 호공(瓠公)이 이끄는 한 지파가 '실라족'이라 불리게 됩니다. 호공의 시라족은 낙랑 지역에 망명처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다시 한반도로 내려와 아리수(漢水)에 도착합니다. 한강을 끼고 넓게 퍼져 있는 초원을 발견한 호공은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인 한터마한의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아리수의 북쪽(현재의 이태원 부근) 영지를 할양받아 마한의 속국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개천(開天) 3841년, 즉 기원전 57년, 부족을 이끌던 우거수가 죽자 그의 아들 불구래(弗矩內)가 겨우 13살의 어린 나이로 수두(蘚塗)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통치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이 인물이 바로 신라의 시조로 알려진 밝혁거세입니다. 그는 나라의 이름을 '새라블(徐羅伐)'이라 정하였고, 후세의 사람들이 이두식으로 읽어 '서라벌'이라 하였습니다.

밝혀거세의 통치 아래 신라는 점차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며, 그의 후계자인 불구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위에 오릅니다. 신라의 왕들은 대개 '박(朴)'씨 성을 가지고 있으며, 밝혁거세의 후손들은 신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들은 신라의 통치 체제를 강화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응하며, 문화와 예술의 발전을 이끌어 나갑니다.

신라의 시조 밝혁거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로, 그들의 통치 아래 신라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밝혁거세의 전설과 그의 후계자들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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