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과 십제국의 탄생: 고대 한국의 역사적 전환점

온조왕(溫祖王)은 고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정착지 선택과 국가 건설은 백제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온조는 이미 상륙해 있던 밝지(百濟) 백성의 10분의 1과 오간(烏干), 마려(馬黎)를 포함한 10신(臣)을 이끌고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사방을 살펴본 후, 현재의 올림픽 공원 일대인 강남(河南) 오리골(慰禮城)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정하였는데, 이는 형님인 비류천황의 나라 밝지의 10분의 1인 동생나라라는 뜻입니다.


개천(開天) 3892년, 즉 기원전 6년 2월 초, 소서노여왕은 비류천황이 이끄는 밝지의 선발대가 목지국 영토의 일부를 장악하고, 온조는 따로 독립하여 한수 남쪽에 새로운 터전을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고 제2차 수송선단과 함께 메주골에 도착합니다. 이후 4년 동안 소서노여왕은 밝지를 떠나 작은아들 온조의 나라 십제국에 머물렀으나, 어떤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형제 간의 불화를 초래했으며, 그 정황은 역사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온조가 최초로 정착했던 곳은 메주골로부터 동쪽 100리 길이었으며, 한산 지역을 돌아본 후 7월부터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8월에는 북천(北遷) 즉, 서울을 북쪽으로 옮기겠다고 비류천황을 제쳐놓고 마한왕(馬韓王)에게 통보했습니다. 이후 서기전 5년 정월, 온조는 강남 오리골로 천도하게 됩니다.

한산(漢山)은 한자 표기에서 "큰 산"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 십제의 온조왕이 찾아간 곳은 경기도의 한 큰 산일 뿐입니다. 그러나 서기전 2년, 국모 소서노여왕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십제국 내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한편, 메주골의 비류천황은 백성들의 수송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강력한 나라 체제를 이루어갔습니다.

온조가 후세에 한성백제로 알려진 십제국을 건설한 해는 서기전 7년입니다. 온조의 십제국은 처음부터 형님 나라 밝지와는 달리 고구려(高句麗)의 통치 제도를 본받아 5방 군현(五方郡縣)의 중앙집권제로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천황 밝지의 통치 제도와 다른 점으로, 십제가 백제의 담로국으로서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천황 백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며 새로 편입되는 지역마다 자치통치권을 갖는 담로왕들을 임명하여 대 해양제국으로 뻗어갔습니다. 온조왕과 그의 십제국의 탄생은 고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백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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