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통령선거가 군부정권의 재집권으로 끝난 후, 1988년 4월에 치러진 총선거는 야 3당(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이 집권 민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며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정치적 변화는 보수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90년 1월 22일 밀실 협상을 통해 3당(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합당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부산 지역에 기반을 둔 민주당과 김영삼 세력이 여당으로 변신하면서 재야 민주세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3당 합당 직후, 부산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2월 22일 ‘민자당 장기집권 음모 저지 및 민중 기본권 쟁취 부산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지역 운동세력을 반민자당투쟁이라는 공동전선으로 묶는 조직적 연대를 확산시켰습니다. 이들은 3월 이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부산 지역 민주운동의 구심체로 자리잡고 있던 국민연합 부산본부의 한계가 드러난 것은 1991년 상반기 투쟁을 통해서였습니다.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학생 폭력살인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대중투쟁이 전개되었고, 5월 4일에는 4~5만 시민이 참여한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노태우 정권퇴진 부산시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시위는 반노태우, 반민자당 정서의 바탕 위에서 시민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6월 20일 지방의원 선거에서 국민연합 부산본부는 후보 3명을 내세웠으나 당선자를 내지 못했습니다. 반면 민자당은 47.6%의 지지를 얻어 광역의회 의석 51석 중 50석을 석권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민자당의 승리는 반호남 지역주의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이는 부마항쟁과 6월항쟁에 앞장섰던 민주화의 도시 부산이 퇴영적 지역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 심각한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주화운동 세력은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최성묵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야당의 통합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91년 4월 재야 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 준비위원회(신민연)와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평민당)이 통합해 창당한 신민주연합당(신민당)에 최고위원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박상도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민연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우정 교수가 최목사님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신민당 창당 1개월 후 최고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최목사님에게 정당 참여를 반대하는 이유로 민주화의 진전으로 교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역할은 끝났으며 지금 입당하면 그동안의 운동이 정치를 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목사님은 3당합당으로 보수대연합이 완성되었으므로, 민주화를 기대할 수 있는 현실적 세력은 김대중의 평민당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민주연합당은 그 해 9월, 3당합당을 거부한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 구 통일민주당 잔류파 5인 의원과 무소속 의원 박찬종, 이철 등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주당(이른바 꼬마민주당)과 통합하게 됩니다. 이 통합대회에 참여한 최성묵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거대 여당 민자당에 맞서는 야당의 통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최성묵의 정당 참여에 대해 가족과 교인 등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임실근 집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최성묵이 정당 참여 문제로 화가 나서 임 집사에게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이 야속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김순이의 회상에 의하면, 최성묵은 신민주연합당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당 정치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 많이 달라서 “선거만 마치면 그만둘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점석이 다른 일로 최성묵을 만난 자리에서 왜 평민당에 입당했는지 물어보았을 때, 최성묵은 허허 웃으며 “정당 정치를 할 생각은 없다”고 명쾌하게 답했습니다. 그는 현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지역주의라며,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부산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성묵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우정 교수는 그를 추천하여 정당에 참여시킨 것에 대해 사과했으며, 김상근 목사는 최성묵이 결코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할 의사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최성묵의 정치 참여는 그가 민중을 위한 길을 걷고자 했던 의지와 함께, 민주화의 길에서 겪었던 갈등과 고민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노력은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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