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발발한 후 최성묵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1950년 8월 21일, 정용철 목사의 제안으로 최성묵과 그의 동료들은 바닷가로 피난을 갔지만, 그곳에서 인민군 정치공작대와 지방 좌익들에게 적발되어 40여 명의 우익 인사들과 함께 연행되는 신세가 되었다.
최성묵은 하느님의 가호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그들은 바닷가의 한 마을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조막손'이라는 빨치산 대장에게 끌려 험한 계곡으로 향하게 되었다. 최성묵은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임을 직감하고 절망에 빠졌다. 계곡에서 최형택이라는 의사가 조막손의 총에 맞아 즉사하는 끔찍한 순간이 다가오고, 이응호라는 교원은 운 좋게 방면되었다. 최성묵은 김종수와 함께 남게 되었고, 조막손은 그들에게 "인민의 적"이라고 외치며 최후의 심판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그 순간 최성묵은 용기를 내어 맞섰다. "나는 여기서 심판받을 수 없습니다. 흥해의 인민위원회에 데려다 주십시오. 그들 앞에서 정당하게 심판받겠습니다." 그의 강한 주장에 조막손은 잠시 웃음을 보이며 그들을 다시 마을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감시 속에 흥해로 향하는 산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성이 들리고, 최성묵은 고통 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기어나가다 만난 한 남자에게 살려달라고 외쳤고, 남자는 그의 상처를 묶어주고 도망쳤다. 최성묵은 기어서라도 남송마을까지 가고자 했지만, 극심한 갈증과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젊은 아낙이 지나가자 그는 물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황급히 논물을 담아 주고 달아났다.
최성묵은 개울물까지 기어가 물을 마신 후, 소를 몰고 지나가는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노파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해가 지고 밝은 달이 떠올라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그는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며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노파가 다시 찾아와 최성묵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오전 9시쯤, 그의 누나와 동생들이 통곡하며 달려왔다. 그들은 최성묵을 침대에 눕히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 도중 총탄이 쏟아져 대밭에 몸을 숨겨야 했다. 정오가 되어 남천 제방에 도착했지만, 의사는 상처를 확인한 후 아무 말 없이 떠나버렸다.
그때 조막손과 치안대원들이 최성묵이 누워있는 천막으로 들어왔다. 최성묵의 누나와 동생이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최성묵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치안대원 중 한 사람은 그가 동창생이라는 이유로 최성묵의 상처를 살펴보게 되었고, 조막손은 그에게 "호박을 걸러 바르시오. 그러면 낫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최성묵은 그 순간, 흉악한 빨치산 대장인 조막손에게도 민족적 양심이 남아 있음을 느꼈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희망을 다시금 품게 되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민과 이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용기와 희망을 잘 보여준다.
그의 경험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는 감동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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