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최성묵의 삶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흥해학도의용대의 부대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최성묵은 직접 겪은 전쟁의 생생한 경험을 육필원고로 남겼으며, 그 기록은 2002년에 간행된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에 수록되어 있다.
전쟁 초기, 인민군은 빠른 속도로 남한을 침략하며 많은 지역을 점령했다. 이때 최성묵은 흥해학도의용대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함께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 1950년 8월 10일, 학도의용대는 150명의 대원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침입을 경계했다. 그날 밤, 포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8월 11일 아침, 인민군이 흥해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최성묵은 즉시 집과 교회 목사님께 상황을 알린 후, 사랑하는 김순이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김순이는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비로소 그와 김순이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최성묵은 몇몇 학생들과 함께 흥해 지서로 가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곧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국군과 함께 후퇴할 희망을 품고 영덕 방면으로 갔지만, 성과 없이 흥해로 돌아와야 했다.
8월 12일, 최성묵은 남송이라는 마을에서 피난 온 가족과 정용철 목사, 교우들을 다시 만났다. 그날 오후 학도대 간부들은 흥해의 지방 좌익이 인민위원회와 치안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최성묵은 동료들을 격려하며 대원 명부를 반드시 빼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형산강과 낙동강 방어선이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8월 13일에는 중학교 1학년인 동생에게 대원 명부를 빼오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어린 나이 덕분에 의심받지 않을 것이었다. 저녁 무렵, 동생은 태극기와 대원 명부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써 학도의용대원의 명단이 인민군의 손에 넘어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8월 15일 아침, 최성묵은 정용철 목사와 함께 해방기념일 축하예배를 올렸다. 피난민으로 가득 찬 교회에서 민족해방을 기념했지만, 곧이어 미군 제트기의 폭격을 받았다. 이는 국군의 반격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8월 16일, 최성묵은 금장리에 피난 가 있는 김순이를 찾기로 결심했다. 김순이의 외가 마을로 향한 그는 김순이의 부모님께 인사하며, 김순이에게 편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순이의 부친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최성묵은 김순이의 오빠를 만나러 갔다는 핑계를 대었다. 김순이는 최성묵의 방문에 긴장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나중에 만나자는 말을 전하고 다시 집을 나섰다.
그 후, 최성묵과 피난민들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미군기의 폭격과 인민군의 활동 속에서 긴장의 연속이었다. 최성묵은 전쟁의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용기를 잃지 않으며, 친구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자 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의 경험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감동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차성환 지음, 임실근 옮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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