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23일,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최성묵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포항 주변의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제트기와 함재기의 폭격, 함포 사격이 이어졌다. 그는 인민군 부상병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치안대가 피난민 천막을 뒤져 남자들을 의용군으로 징발하는 상황에 처했다. 최성묵은 조막손이 권유한 대로 호박을 상처에 발랐으나 통증은 여전했고, 몸은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상처를 방치하면 죽음이 임박할 것이라는 판단에 최성묵은 가족들에게 중대한 제안을 했다. 그는 인민군 야전병원에 입원하겠다고 결심했다. 가족들은 그의 제안에 통곡하며 절망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치료를 받겠다고 요청했다. 8월 25일, 형제와 친구, 이웃의 도움으로 최성묵은 담가에 실려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좁은 길을 넘어 3km를 힘겹게 이동하던 중, 산발적인 포격과 비행기의 공습이 그를 위협했다.
야전병원인 제1터널에 도착한 최성묵은 환자들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 속에서 공포를 느꼈다. 군의관이 그의 상처를 보고 수술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자, 최성묵은 마침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수술 후 그는 시원한 터널 속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군의관은 "반드시 회복시켜 자기 발로 집으로 걸어가도록 해 줄 터이니 여성 동무들은 집으로 가시오"라고 말했다. 누나는 치료를 위해 남고 싶어 했지만, 군의관은 그녀를 제2터널로 옮기도록 했다.
이송 도중, 제트기가 나타나 기총 사격을 퍼부었다. 최성묵은 다시 한 번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생명을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제2터널에 도착한 그는 많은 환자들과 함께 누워 있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식욕은 떨어져 국물만 마시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9월 2일, 최성묵은 고향의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던 중, 방금 부른 찬송가를 알고 있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그녀는 흥해로 피난 갔던 교회의 교인으로, 최성묵에게 약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 나타난 환자 수송 차량이 그를 북으로 데려가야 했다. 최성묵은 아가씨와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치료를 받기 위해 인민군과 함께 떠나기로 결심했다.
트럭은 북쪽으로 향하며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달렸다. 도중에 동해 쪽에서 들려오는 폭격 소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트럭은 영양에 도착해 환자들을 내려놓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대기 중이던 군의관이 환자들의 상태를 점검하던 중 두 명이 숨을 거두었고, 그 시체는 강물에 던져졌다.
최성묵은 다시 트럭에 실려 춘천으로 향했다. 미군의 폭격을 피하며 빈 집에서 양식을 찾아 밥을 지어 먹는 긴 여정 속에서, 그는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춘천 인민군 야전병원에 도착했지만, 미군의 폭격은 더욱 심해져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전쟁 속에서의 고난과 생존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끈질긴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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