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조선은 마침내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해는 최성묵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의창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1월 5일 포항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포항중학교는 일제시대 5년제로 운영되었으나 해방 이후 6년제로 바뀌었다.
흥해에서 포항까지는 약 20리로, 최성묵은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통학했다.
이 시기 최성묵의 활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48년 1월 7일, 흥해교회의 박순석 목사는 미래세대의 신앙교육을 위해 소년회를 창립하였고, 최성묵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포항중학교 3학년 때였고, 이 시기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젊은 정용철 목사가 시무하면서 교회는 여러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게 된다. 정 목사는 학생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신대의 김재준 교수에게 젊은 교역자의 파견을 부탁했고, 강혜순 전도사가 흥해에 파견되었다.
최성묵은 소년회 회장으로서 강혜순 전도사와 함께 활동하며 많은 재능을 발휘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성가대를 지휘하고, 연극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는 사소한 일도 스스로 찾아서 하며, 하급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그의 소박한 생활 태도는 강 전도사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단벌 신사는 걱정이 없어요"라는 농담을 하며 근검절약의 삶을 지켜갔다.
음악 활동 또한 활발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1953년부터 1957년까지는 정식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포항중학교 악대반의 반장으로서 트럼펫을 불며 학교 행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여름 성경학교 때는 바닷가에서 대열을 이끌며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학교 생활은 전쟁의 여파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학적부에는 출석 상황이 불량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6·25 전쟁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는 당시 중학교에서 우익 학생 그룹의 지도자 역할을 하며 학도의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최성묵은 전쟁 중 격동의 시기에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2살 연하인 김순이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흥해교회 소년회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봉건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몰래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들의 사랑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은밀하게 깊어졌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소 양국의 분단 속에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1948년에는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긴박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처럼 최성묵의 소년시절은 해방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형성된 성장 이야기로, 그의 신앙과 리더십은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차성환 지음, 임실근 옮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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