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의 탈출기: 전쟁 속에서의 생존과 회복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인민군은 환자를 더 이상 트럭으로 후송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최성묵은 치료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흥해를 향해 남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힘든 몸을 막대기에 의지해 겨우 일어선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

최성묵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먼저 죽은 인민군 시체에서 옷을 벗겨 인민군복을 입었다. 그 후 북쪽으로 도주하는 인민군 부대를 만나면 숨고, 어두워지면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씩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남쪽으로 향한 날 밤, 그는 희미한 달빛 아래 산막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던 중, 안에서 "누구냐?"라는 목소리와 함께 총구가 튀어나왔다. 다행히도 그는 야전병원에서 주워들은 인민군 부대를 대며 위기를 넘겼다.

산막 안에는 두 명의 인민군이 추위를 피하고 있었고, 최성묵은 그들과 함께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인민군들이 함께 북으로 가자고 할 때, 그는 몸이 아프니 조금 더 쉬고 가겠다고 하여 그들이 떠난 후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힘든 걸음으로 나아가도 하루에 10리도 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흥해에 도착하는 데 거의 두 달이 걸렸다. 그 사이에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루한 인민군복을 입고 머리는 빡빡 밀린 채, 허리는 총상으로 휘어지고 얼굴과 몸은 피골이 상접한 최성묵은 영덕 근처에서 국군에게 붙잡혔다. 국군 소대장은 그의 신원을 물었고, 최성묵은 자신이 대한민국 포항중학생이며 흥해제일교회 학생회장이고 장로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주 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워 보라고 했고, 최성묵은 정확히 외웠다. 이번에는 찬송가를 불러보라고 하자, 그는 아픈 허리를 움켜쥐고 죽을 힘을 다해 찬송가를 불렀다. 후일 최성묵은 그때만큼 온몸으로 찬송가를 불렀던 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국군 소대장은 그를 자기 막사로 데려가 재워주고, 다음날 국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남쪽으로 가는 트럭에 태워 포항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약간의 용돈까지 주었다. 최성묵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후 포항까지 간 그는 밤새 걸어서 새벽녘에 흥해에 도착하였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전쟁의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으려는 끈질긴 의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생존을 위한 결단을 내리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연민과 도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연대감과 사랑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감동적인 기록으로 남는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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