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의 결혼식: 부모님(장로, 권사)이 불참한 사랑의 결실

1953년, 최성묵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1학기를 마친 후 2학기에는 휴학계를 냈다.

그 해 가을, 서울대학교는 서울로 이전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경험을 충분히 맛본 그는 점점 신학 쪽으로 기울어갔다.

6·25 전쟁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고, 교회 활동을 통해 목회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최성묵에게는 결혼이라는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최성묵과 김순이는 모두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김순이는 집안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양가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

최성묵의 어머니, 안갑선 집사는 아들이 김순이와의 연애는 물론 결혼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너희들끼리 부모의 승낙도 없이 한 약속을 내가 왜 인정해?”라는 말과 함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최성묵은 “결혼은 제가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강력히 주장했지만, 어머니의 거부는 변하지 않았다.

김순이의 집에서도 부친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유교적 가치관을 고수하던 김순이의 아버지는 최성묵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성묵이 전쟁 중 총상을 입었다는 사실도 문제가 되었다. 결혼을 원하던 두 사람은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흥해처럼 좁은 사회에서는 주례를 서줄 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모의 반대 속에서 결혼식을 주례할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흥해제일교회의 교인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며 약혼식을 준비해 주었다. 흥해중학교의 교실에서 교인들이 모여 약혼식을 올렸고, 이들은 진심으로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했다.

1954년 봄, 최성묵은 흥해중학교의 영어교사로 발령받았다. 서울대학교는 더 이상 다닐 생각이 없었고, 결혼을 염두에 두면 생계를 꾸릴 직업이 필요했다. 김순이는 포항의 외자관리청에서 일하며 주말마다 흥해로 와서 최성묵과 만났다. 두 사람은 결혼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주례를 서줄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혼문제로 인한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최성묵은 결국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책을 챙겨 한 친구의 집에서 학교로 출퇴근하며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흥해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맞아 길진경 목사가 초빙되었다. 길 목사는 최성묵과 김순이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의 결혼을 주례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흥해에 살지 않는 목사였기에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식은 급속도로 추진되었고, 최성묵은 김순이에게 연락을 했다. 김순이는 그날 막차를 타고 흥해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교회로 가서 결혼식을 준비했다. 결혼식은 1954년 12월 3일, 길진경 목사의 주례로 교회에서 올려졌다.

결혼식 후 신부 집에서 잔치가 열렸고, 최성묵은 김순이의 친정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장인은 사위를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장인은 최성묵이 인사를 드리면 못마땅한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기 일쑤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어색한 처가살이는 1955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최성묵과 김순이의 결혼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과 신념을 지키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함께 성장해 나갔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선택한 길을 걸어갔고, 그 과정에서 더욱 깊은 사랑을 쌓아갔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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