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3월 25일, 최성묵은 흥해중학교를 사직하게 되었다.
당시 흥해중학교 교장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최성묵은 참지 못하고, 직원회의에서 교장을 성토한 후 즉시 사표를 던졌다. 그의 행동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지 않으려는 강한 성격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최성묵은 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행동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사직 후 며칠이 지나고, 포항고등학교의 학생 몇 명이 최성묵을 찾아왔다. 그들은 그에게 포항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포항에서 서울대학교 수학과 출신의 강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학생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최성묵은 학생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1955년 4월 6일 포항고등학교의 수학 강사로 임명되어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최성묵은 단순히 수학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수업을 통해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후배들에게 전달했다. 당시 그의 제자였던 김정조는 최성묵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햄릿처럼 수려하고 우수에 찬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일류대학 출신의 준수한 애송이 수학교사의 출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강의 시간의 틈새마다 문학, 철학, 예술의 세계가 펼쳐졌고, 그는 섬광과 같은 가능성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참으로 잘난 선배교사였다.”
포항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최성묵 부부는 분가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최성묵의 모친 안갑선 집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방 하나를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들의 살림살이는 식기와 냄비 정도가 전부였다. 비록 소박하고 부족한 살림이었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에 기독교장로회의 지도자 김재준 박사가 포항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고, 최성묵은 설교 장소로 포항고등학교 강당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재준 박사는 1956년 가을에도 흥해제일교회의 사경회에 참석하여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최성묵은 평소 존경하던 김 박사를 만나면서 신학 공부에 대한 열망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최성묵의 포항고등학교 교사 시절은 그가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학생들에게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인문학적 소양과 신앙의 중요성을 함께 나누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의 열정과 신념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서도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앞으로의 신학 공부와 목회에 대한 결심으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최성묵이 단순한 수학교사가 아닌, 인생의 길잡이로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최성묵의 삶은 교육의 진정한 의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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