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최성묵은 겨울 동안 가족들의 각별한 간호 아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상태는 최악이었고, 몸은 뼈와 가죽만 남은 듯 말라 있었으며, 허리는 총상의 영향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최성묵은 김순이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김순이의 오빠를 만나러 간다고 둘러대며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김순이는 그의 몰골을 보고 놀라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성묵은 주일마다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불편한 몸으로도 건강 회복에 힘썼다. 이 시기에 최성묵은 ‘골자(骨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그의 쇠약한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이때 최성묵과 함께 인민군 정치공작대에 체포되었던 정용철 목사가 무사히 돌아와 시무하고 있었다. 흥해교회는 전쟁 중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었지만, 교인들은 폐허에서 노천 예배를 드리며 공동체의 신앙을 지켰다.
1951년 봄, 최성묵은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가오자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수학과에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평소 수학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운영되고 있었고, 최성묵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큰 누나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흥해에서는 그의 합격 소식이 큰 사건으로 여겨졌다.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거리에 내걸리기도 했다.
1951년 7월 18일, 최성묵은 포항중학교를 졸업하고 9월 1일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입학과 함께 휴학하게 되었다. 그는 등록과 휴학을 반복하며 학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누나 집에 기숙하며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다녔다.
이 시기에 김순이도 부산으로 와 있었다. 김순이는 오빠의 직업 덕분에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성타이프학원에 등록하여 영문 타자를 익히고, 이후 개원국민학교의 교사로 발령받았다. 김순이는 이곳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최성묵을 보러 가끔씩 찾아갔다. 그들은 바닷가를 산책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순이가 포항으로 직장을 옮긴 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갔다. 흥해에서는 이미 두 사람의 연애가 소문이 났지만, 당시의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유연애는 사회적 금기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해교회의 신도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고 축복해 주었다. 최성묵은 성가대 지휘자로서 열심히 봉사하며 교회에 헌신했다.
최성묵의 노력과 김순이의 사랑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곁에서 지지하며,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사랑을 키워갔다. 이 이야기는 전쟁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고, 서로의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나가는 두 사람의 감동적인 여정을 잘 보여준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종교, 사상, 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성묵 목사의 결혼식: 부모님(장로, 권사)이 불참한 사랑의 결실 (4) | 2024.10.26 |
---|---|
최성묵 목사의 신앙 여정: 장로 아버지의 소천과 흥해교회의 분립 (1) | 2024.10.26 |
원수를 사랑하라: 최성묵 목사의 용기와 믿음 (1) | 2024.10.26 |
기적의 생환: 최성묵 목사의 생사를 건 귀환 이야기 (1) | 2024.10.26 |
최성묵 목사의 혈육을 찾아서: 전쟁 속의 가족의 여정 (1) | 2024.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