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25일, 최성묵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남아 있었고, 그의 누나와 형제들은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이때 들려오는 소문은 인민군 야전병원에 있던 환자들을 밤에 트럭에 실어 포항 보경사로 옮기고, 상태가 나은 사람들은 다시 영덕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와 이웃 할머니는 가족을 찾기 위해 보경사로 가기로 의논했다.
그때, 김순이가 나타났다. 그녀는 피난길에 최성묵이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기 위해 최성묵 일가의 피난처로 달려온 것이었다. 최성묵의 누나는 김순이에게 동행을 제의했고, 김순이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다. 이렇게 세 사람의 여인은 길을 떠났다. 어두워지면 농가의 마당을 빌려 잠을 청하며 힘든 여정을 이어갔다.
보경사에 도착하자 인민군이 따발총을 들고 그들을 가로막았다. 김순이는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인민군을 환영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하며 환자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다. 보경사 내부는 빈 방에 보리짚을 깐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상태가 나은 사람들은 바깥 나무 밑에 쉬고 있었다. 그러나 세 여인은 찾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세 여인은 다시 영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8월의 찌는 더위 속을 걷다 보니 또 하루 해가 저물었다. 바닷가의 농가 마당을 빌려 잠을 청했지만, 모기의 공격에 시달렸다. 아침이 밝자 다시 영덕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지만, 중간에 인민군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영덕으로 가도 소용없다. 환자들은 다 북쪽으로 후송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찾는 사람을 만날 기약이 없어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흥해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흥해는 다시 수복되었다. 경주 과수원에서 애태우던 부모님과 최성묵의 형제들은 흥해에서 재회했지만, 최성묵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흥해의 집은 폭격을 맞아 날아가 버렸다. 결국 최성묵의 가족은 고모댁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고모댁은 당시 천석꾼으로 잘 살았고, 넓은 집 덕분에 우선 지낼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최성묵의 가족은 그를 찾기 위해 애타는 마음을 품고 지내야 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족이 서로를 찾는 여정은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남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이 이야기는 전쟁 속에서도 가족의 끈끈한 유대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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