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회가 격변하는 시기에 선생님은 정치에도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셨습니다. 민추협 이후 전두환 정권 시절의 민주화 과정에서 김광일 변호사와 노무현 변호사에게 공천권을 주셨고, 두 분은 출마하였지만 김재규 형은 선거 자금 문제로 스스로 포기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간이 지나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선생님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후보 단일화를 위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지도자가 각자의 길을 갈 때, 선생님은 김대중 노선의 맨 앞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현직 목회자로서는 최초로 짧은 기간이지만 평민당 부총재를 역임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역 민주화를 위한 지방자치 정부의 운영과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의 행동의 당위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선생님은 간혹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교인들 때문에 성이 나시면, 주일 예배를 마치고 1층 예배당에서 점심식사 중에도 공개적으로 “야! 이 부르주아 같은 놈아!”라고 호된 꾸중을 하셨습니다. 교회 집사와 장로들이 놀라고, 주변의 모든 신도들이 나의 태도 변화만을 살피곤 했습니다. 당시 후배 집사인 이태성군은 두 사람의 진실을 모르고 “형님! 왜 참아요?”라고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면서도 선생님의 참모습이 떠오릅니다.
중부교회는 부산의 민주화 성지이자, 교인들의 신앙심이 깊은 교회였습니다. 선생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지켜준 것은 교인 모두의 힘이었으며, 특히 선생님이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박순금 장로와 조성항 장로 등 선생님을 믿고 섬겼던 분들의 깊은 신앙심과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권사들의 행동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전 서울 YMCA 연맹 강문규 사무총장의 어머니이신 고 최현순 원로 권사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시기 며칠 전, 교회에 오시면서 힘들게 계단을 오르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신의 혼자 힘으로 성전의 계단을 오르시는 그 진지한 모습에서, 나는 그분의 높은 신앙심과 인생의 진지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몇 분 더 계셨음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중부교회 시절, 가장 가슴 아픈 추억 중 하나는 교회 일부 청년들이 선생님께 조직적으로 항명한 사건입니다. 그 청년학생들 중 일부는 유신 시절 감옥에서 고생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가담하여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한때, 모두 인간 최성묵을 ‘청년 예수’처럼 따르던 순수한 학생과 청년들이었습니다.
유신 독재가 한창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 이간질을 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지 못하지만, 사건의 발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선 동안 선생님께 꾸중과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 그 일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 특히 고 박순금 장로와 조성항 장로, 여성 장로들과 이해원, 이경화 등 청년 여신도들, 그리고 김성철, 김수철, 이태성 등 청년들이 교회를 지켜냈고, 선생님께 힘을 주셨습니다.
이런 기억들은 중부교회가 단순한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민주화와 인간 해방을 위한 싸움의 장이었음을 일깨워줍니다.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은 지금도 나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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