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유신이 한창 진행되던 겨울, 필자는 학생과 청년들로 구성된 51명으로 제주도 행군대회를 주최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당시 유신 정부가 지원하던 사회 운동 단체의 학생 행군 대회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남녀 학생과 청년들은 섬나라 일주 행군을 하며 혼숙(?)을 하고, 13박 14일 동안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빠른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서귀포에서 저녁 휴식시간에 선술집에서 많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며 “유신 반대!”를 외쳤고, 급기야 그 자리에 모인 손님과 집주인 모두가 유신 반대를 위한 집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많은 부분 술을 공짜로 주는 헤프닝도 벌어졌습니다. 이후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부산 YMCA 중심의 젊은이 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부산 YMCA 총무로 재직하시면서 부산 YMCA 사회체육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현재 부산시 사회체육센터의 오동석 사무총장과 선생님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선생님은 오동석 형의 사회체육에 대한 신념과 비전을 높이 평가하여, 어려운 YMCA 살림살이 속에서도 좌천동 현재 부산 YMCA 건물의 옛터 뒤편에 초라하지만 단층 건물을 지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양성되었으며, 부산시의 새로운 사회체육 시스템이 계획되었습니다. 그때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이 현재 부산 YMCA 사회체육 시스템 책임자인 김길구 선생입니다.
부산 시민을 위한 사회체육 운동은 많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이면에는 오동석 형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를 묵묵히 지원해 주던 선생님의 신념과 혜안이 있었습니다.
1976년 겨울, 저는 대학교 4학년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은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이철, 김재규, 김영일, 조태원, 이태성 등 많은 선배와 후배들이 ‘긴급조치’와 ‘반공법 위반’으로 원하지 않는 감옥에 잡혀가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최성묵 목사도 이제는 감옥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돌았고, 저도 운동권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즈음, 저는 선생님과 충무동의 어느 선술집에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정권과 몸으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비굴하진 않지만 제가 원하는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정색을 하시며 “이놈아! 언제 내가 감옥에 가라고 했느냐, 올바른 사람이 되라 했지!”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우리 인생은 유한하다. 언젠가 하나님이 거두어 갈 생명이다. 민주시민으로서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살아있는 고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지위에 있거나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후, 선생님의 말씀은 제 인생의 기본 지침이 되었고, 살아가는 데 있어 삶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 신념은 지금도 제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선생님이 보여주신 용기와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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