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선생님의 일상생활은 청년들과 뜻을 함께하는 인사들, 독자적인 행동과 교회 설교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는 연속이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 선생님의 민주화 투쟁은 그 강도를 더해갔습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회유나 징벌에도 굴하지 않고, 대의와 진실을 위해 마지막 성전을 위해 싸우듯 위협적인 존재로 일관하셨습니다.
평소 선생님께서 부르짖던 양심과 인간성을 통한 친화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 않았지만, 과거 서울에서 활동할 때 교류했던 민주 인사들, 부산의 김동수 박사와 신부,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대구, 포항, 울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광주 민주화 일곱 돌이 가까워지면서 일어난 서울과 광주 중심의 반정부 데모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이한열 군의 죽음으로 가속화된 6월 항쟁의 소동 속에서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젊은 기상으로 당당하게 민중 속에서 그들을 이끌고 계셨습니다.
부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주도하시던 날, 부산의 유명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선생님 모습은 혁명가적인 기질과 예술가적인 모습, 그리고 정의의 사도로서 한 인간의 참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1985년, 선생님은 장애자들을 위해 한울장애자자활센터를 설립하셨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에게 전산 교육과 인간 교육을 제공했으며, 박영미 총무, 최혜림 총무 등 역대 지도자들과 이숙희 선생 등 교회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동정적 접근이 아닌,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지식 공동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지금 많은 장애인들이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일반인들보다 더욱 떳떳하게 정보 지식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산 YMCA 총무부의 유정애 선생님이 바로 1기생 중 한 분입니다.
선생님은 많은 교인들에게 자상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울장애자자활센터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교인들의 결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주례를 주관하셨습니다. 또한 교인들의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고, 교인들이 사업을 하게 되면 회사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예: 에덴주택). 그러나 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어, 집 한 채도 없으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목회 은퇴 뒤를 생각하며, 주택 사업을 하던 박상도 형을 찾아가 “상도형! 선생님을 위해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합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우창웅 교수도 연체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렇게 괴정4동 벽산 아파트는 선생님 몰래 마련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단순히 교회의 목회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천적 신학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그 유산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그가 꿈꾸었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계속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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