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휴전을 앞둔 1952년, 최성묵의 주변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그의 부친 최석현 장로의 소천이었고, 둘째, 대한예수교장로회 내에서 교리 문제를 둘러싼 분열이 발생하여 흥해교회가 두 개로 분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석현 장로의 별세는 최성묵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 신도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별세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흥해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1952년으로 추측된다. 호적부에는 1957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 경에 소천하신 것으로 보인다. 최 장로는 아직 미혼의 자녀들을 부인에게 맡기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죽음은 최성묵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더욱 명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성묵은 1950년 겨울, 부역자를 가려내라는 군경의 독촉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명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신념은 그의 삶의 지표가 되었다.
또 다른 큰 사건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1947년 대구총회에서 시작되었고, 신학교육 이념과 방법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김재준 교수의 ‘성경문자유오설’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총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지만, ‘성경문자유오설’은 전통적인 ‘축자영감설’에 대한 반론으로 신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론의 충돌은 보수적인 교계세력과의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1951년 부산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취소하고, 1952년 대구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졸업생이 장로회 목사로 안수받을 수 없다는 결의를 내렸다. 이 결의에 불복한 총대들은 ‘대한예수회장로회호헌대회’를 결성하고, 결국 1953년 6월 김세열 목사 등이 제38회 호헌총회를 개최하여 기독교장로회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단의 대립은 각 지역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흥해교회에 대해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지지한 정용철 목사에 대해 시무 정지를 결의했으나, 흥해교회의 당회와 대다수 교인은 이에 반대했다. 이후 1952년, 대구총회 결의를 지지하는 하동백 장로와 30여 명의 교인들은 흥해중앙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정용철 목사와 그를 따르는 150여 명의 교인들은 흥해제일교회를 세워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하였다.
최성묵은 이러한 교회의 분립 과정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보수주의에 반대하여 앞장서서 교인들을 흥해제일교회로 이끌었다. 그의 신앙과 결단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공동체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성묵의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을 넘어, 전쟁과 분열 속에서도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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