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은 김재준 박사의 권유로 한신대학교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1955년 한 해 동안 근무했던 포항고등학교를 사직하고, 1956년 4월 5일 한국신학대학 2학년에 편입학했다.
새로운 길을 향해 흥해를 떠난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도착한 최성묵은 1949년부터 흥해제일교회에서 일했던 강혜순 전도사의 큰집에서 그의 조카의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강 전도사의 남편인 김광열 장로가 소개해 준 것이었다. 당시 강 전도사는 결혼하여 제천에 살고 있었고, 최성묵은 그 집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김순이도 남편과 함께 상경한 후, 강 전도사의 권유로 몇 개월간 제천에서 생활했지만 첫 아이의 임신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해산하게 되었다. 그녀는 장녀 혜림을 출산하고, 얼마 후 그녀는 장녀를 데리고 시집으로 들어갔다. 결혼 후 시간이 꽤 흐른 뒤, 손녀가 생기자 시어머니인 안집사는 노여움을 풀고 며느리를 받아들였다. 이후 김순이는 과수원에서 일하며 최성묵이 한신대를 졸업할 때까지 고된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1959년 3월, 최성묵은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충북 제천에 있는 제천중학교의 교사이자 제천제일교회의 전도사로서 새로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초빙한 것은 강혜순 전도사의 남편인 김광열 장로였다. 김 장로는 제천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제천중학교 등 학교법인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최성묵은 가족과 함께 제천읍에 살면서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주일에는 교회 일도 함께 맡아 수행했다.
최성묵의 한신대 진학과 제천에서의 새로운 시작은 그가 신학과 교육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신학 공부와 교육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최성묵의 이야기는 단순한 학업의 연장이 아니라, 신앙과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신학과 교육 분야에서의 그의 기여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최성묵의 삶은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그가 선택한 길에서 더욱 빛날 것이었다.
차성환 지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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